영국 태생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61)에게는 ‘사색가’ ‘지성인’ ‘박식가(polymath)’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2009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살아있는 박식가 20인’으로 움베르토 에코(1932~2016), 재러드 다이아몬드(85), 올리버 색스(1933~2015) 등과 함께 허프를 선정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연주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런던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 음악과 종교에 관한 책뿐 아니라 소설까지 쓴 작가인 허프를 ‘21세기 대표 르네상스 맨’ 중 한 명으로 꼽은 것이다.
그가 2019년 펴낸 에세이집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에서 음악가이자 사색가, 지성인, 박식가인 허프를 만날 수 있다. 책이 다루는 주제는 음악과 연주가의 생활부터 그가 가본 장소와 보고 읽은 그림과 책에 대한 소회, 학생과 후배에게 전하는 조언, 종교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 논의까지 광범위하다. 허프는 비교적 짧은 글들에 깊은 사유와 해박한 지식에서 건져 올린 성찰과 메시지를 담아냈다.
지적이고 완벽한 이미지의 허프가 공연 중 겪은 실수나 굴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 웃음을 자아낸다. 1982년 21세 허프가 샌님 같은 안경을 끼고 격렬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6번을 연주했을 때다. 마지막 타건과 함께 고개를 뒤로 확 젖혔을 때 안경이 날아가 약 3m 뒤 바닥에 떨어졌다. 허브는 앞이 안 보이는 상태로 몇 번 인사한 뒤 안경을 찾느라 네 발로 기어야 했고, 청중의 박장대소를 들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이후로 깨어 있는 시간에는 콘택트렌즈를 착용한다고 했다.
허프는 올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를 위해 경연자들의 현대음악 필수 곡인 ‘팡파르 토카타’를 작곡했고, 대회 심사위원도 맡았다. 임윤찬은 이 대회에서 우승과 함께 허프의 곡을 가장 잘 연주한 경연자에게 주는 현대음악상도 받았다. 허프는 출판사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윤찬군이 준결선에서 리스트의 고난도 피아노 연습곡 초절기교를 연주했을 때 그가 진정으로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꼈다”며 “빠른 손가락의 영특함보다는 그가 리스트의 수사학과 시야, 성격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허프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덧붙였다. 책에도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들을 위한 글에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가장 큰 위험은 그 나이대의 누구도 탈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찬군이 그가 찾고 싶은 것들을 발견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느끼길 바란다. 그의 앞날은 수십 년이나 남아 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