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날개, 동그랗게 말린 깃털, 고개를 뒤로 돌려 깃을 고르는 뾰족한 부리….
미국 서부 최대 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 1층에는 청동으로 만든 수탉 조각이 놓여 있다.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남긴 몇 안 되는 조각작품 중 하나다. 이 조각에는 비밀이 있다. 피카소가 내연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사진)의 모습을 곳곳에 숨겨둔 것. 넓은 이마와 짧은 머리가 대표적이다.
피카소는 1920~1930년대 발테르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을 여럿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다음달 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하는 ‘프리즈 서울’에 온다. 발테르의 얼굴에 또 다른 연인 도라 마르를 겹쳐 그린 ‘술이 달린 붉은 베레모를 쓴 여자’(1937년)란 작품이다.
피카소와 발테르의 만남은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카소는 46세였고, 발테르는 18세였다. 피카소가 발테르에게 모델을 제의한 것을 계기로 둘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피카소는 28살이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발테르에게 강하게 끌렸고, 끈질기게 구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피카소는 우크라이나 출신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변덕스러운 성격의 피카소가 코클로바에게 싫증났을 때 운명처럼 발테르가 그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발테르는 피카소가 만난 수많은 연인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뮤즈다. 그는 발테르를 ‘황금 같은 뮤즈’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카소의 또 다른 연인이었던 프랑수아즈 질로가 “그녀는 피카소에게 우주적이고 초현실적인 질서와 조화의 상징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카소는 풍만한 곡선과 화려한 색채로 발테르의 여성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작품을 다수 만들었다.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1932년)이 그랬다. 고개를 옆으로 젖힌 재 평화롭게 잠든 발테르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피카소에게 착하고 순진한 발테르가 마치 꿈 같은 쉼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5월 경매시장에서 856억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던 ‘누워있는 벌거벗은 여자’(1932년)도 발테르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여성의 특징을 추상화한 이 그림에 대해 경매 주관사 소더비는 “발테르의 성적 매력과 우아함을 동시에 담았다”는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발테르는 피카소의 연인 중 가장 유명했지만 유일한 연인은 아니었다. 피카소가 1936년 유고슬라비아 출신 사진작가 마르를 만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난다. LACMA 피카소 전시관에 있는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1937년)의 모델이 바로 도라 마르다. 프리즈 서울에 출품되는 ‘술이 달린 붉은 베레모를 쓴 여자’는 발테르와 마르가 한꺼번에 담긴 작품이다. 2017년 영국 사업가에게 400억원대에 판매됐다.
로스앤젤레스=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