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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의 판소리' 수묵화처럼 그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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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은 영어로 뭐라 번역할까. 외신이나 해외 연구서는 ‘Han’이라고 적는다. 분노, 슬픔, 후회, 애정… 여러 감정이 뒤섞인, 응어리진 마음을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인의 한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다.

2010년 초연해 올해 마지막 시즌을 맞은 뮤지컬 ‘서편제’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오는 10월 23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한다. 뮤지컬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살다 보면 살아진다’ 등 깊이 있는 노래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무 살에 최연소·최장시간 ‘춘향가’ 완창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린 소리꾼 이자람, 국악 집안 출신 뮤지컬 스타 차지연 등이 주연을 맡아왔다. 원작 판권 계약이 올해로 종료돼 뮤지컬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한의 노래’를 좀 더 듣고 싶은 관객들에게 원작 소설을 권한다.

<서편제>의 주요 등장인물은 떠돌이 소리꾼 아버지와 두 남매다. 판소리를 가르치던 아들이 품을 떠나자 아버지는 잠든 딸의 눈에 몰래 청강수(염산)를 넣어 두 눈을 멀게 한다. 엽기적 범죄를 저질러놓고 아버지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는다. 아들처럼 딸도 자신을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던 걸까. 사람들은 그가 딸에게 ‘한’을 심으려 그런 짓을 벌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한다던가요?”

<서편제>는 사실 다섯 편으로 이뤄진 연작소설 중 일부다. 이청준 작가는 1976년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단편소설 ‘서편제’를 발표한 이후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 등 이어지는 소설을 썼다. 연작소설 다섯 편은 <남도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소설은 한 편씩 읽어도 좋지만, 같이 읽으면 깊이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소리의 빛’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느 주막에서 재회한 소리꾼 남매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바로 서로를 알아챘지만, 한마디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자네가 살아온 반생의 내력도 자네 한을 보면 저절로 다 알아볼 수가 있다”며 밤새 소리만 나눈다. 날이 밝도록 누이의 노래에 북장단을 맞추던 오라비는 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소설은 인물의 내면을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수묵화 같다. 임권택 감독은 다섯 편 중에서 ‘서편제’와 ‘소리의 빛’ 두 편을 재구성해 영화 ‘서편제’를 만들었다. 연작소설 중 ‘선학동 나그네’도 이후 임 감독이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1970년대에 발표된 <서편제>는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문학에 속한다. 통상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가르는 기준은 19세기 전후다. 하지만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인 ‘한’과 한국의 고전 공연예술 판소리를 전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의 주요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서편제는 판소리 유파 중 하나로, 구성지고 애절한 가락이 특징이다. 동편제도, 중고제도 아닌 서편제를 택한 건 작가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 서편제의 주요 활동 지역은 이청준 작가의 고향인 전남 장흥과 그 인근 보성 일대다. 판소리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이 작가는 늦둥이 딸을 위해 판소리 동화를 쓰기도 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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