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도 정부도 ‘깜깜’
기관투자가는 물론 개인까지 해외투자가 일반화된 상황이지만 투자전문가집단인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는 현재까지 문제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한국세무사회가 “BEPS 방지협약 중 역혼성단체 방지 규정 등에 대처해야 한다”며 입법 건의안을 마련했지만 증권·자산운용업계, 금융투자협회 등 투자 유관기관, 정부 모두 “별문제가 안 될 것”이라며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는 지적이다.하지만 국내 투자자와 기업이 대체투자 등을 위해 설립한 해외 특수목적법인(SPC)들이 역혼성단체로 계속 분류되면 해외투자 수익에 대한 세금이 크게 증가하는 게 불가피해진다.
예컨대 국내 기관이 미국에 SPC를 세워 현지 기업에 투자해 1000억원의 이익을 거뒀다면 지금까지는 150억원만 세금으로 내면 됐다. 한·미조세조약에 따라 현지 배당소득세가 최대 15%까지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SPC가 역혼성단체로 분류되면 앞으론 조세조약이 적용되지 않고 미국 세법 표준세율에 따라 30%인 300억원을 내야 한다.
유럽연합(EU) 국가에서도 기존까진 현지 SPC가 ‘도관(파트너십) 조직’으로 간주돼 소득이 확정됐을 때 국내에서만 세금을 내도 됐지만, 올해 1월부터는 법인으로 간주돼 현지에서 과세된다. 국가별로 평균 25% 정도에 달한다.
개인과 기업도 ‘발등의 불’
이런 변화는 해외에 투자하는 국내 모든 투자 주체에 영향을 미친다. 수조원을 들여 해외에 투자하거나 현지 법인을 인수한 대기업들이 우선 직격탄을 맞을 위기다.가령 미국에 투자하는 국내 대기업들은 각지에 공장·설비를 두더라도 세금 혜택이 있는 주(州)에 SPC를 세워 이들 자산을 관리하는 사례가 많다. 역혼성단체에 해당되면 이 SPC가 한국에 송금하는 배당수익 관련 세금은 자칫 두 배로 늘 수 있다.
해외 대체투자 등에 속도를 내왔던 국민연금, KIC 등 국내 주요 연기금도 비상이 걸렸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대체투자를 통해 얻은 수익은 22조4174억원에 달한다. 업계에선 이 중 80%에 달하는 18조원을 해외 투자에서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한다. KIC도 SPC 활용이 일상적인 대체투자 분야에서 10조원을 벌어들였다. 국내 투자자가 역혼성단체 방지 규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두 기관에서만 지난해 이익의 15%인 최대 3조원 이상의 세금을 추가로 해외에서 납부해야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개인투자자가 국내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를 통해 해외 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부동산·인프라 등 대체투자도 과세 폭탄에 직면할 수 있다.
시행령이라도 빨리 고쳐야
주관부처인 기획재정부 등은 해당 사안에 대해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BEPS 도입에 맞춰 큰 틀의 세법개정안은 마쳤지만 세부 사항은 업계나 관련자의 요청이 있을 때 이에 맞춰 규정을 정비하는 경우도 있다”며 “아직 업계에서 문제 제기가 없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세정당국은 역혼성단체 관련 ‘세법 구멍’ 보완을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할지, 법 개정을 통해 할지도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국회 통과가 요구되는 법 개정이 힘들 경우 올해 소득 집계가 완료되는 연말까지는 빨리 시행령이라도 개정해 국내 투자자가 해외에 세운 SPC들을 도관(파트너십) 조직으로 명확하게 간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행령에 SPC가 해외 소득을 분배할 때 소득 원천(배당·이자·양도소득 등)을 명확히 구분하도록 하고, 실제 분배 여부와 관계없이 SPC가 이익을 받은 시점에 즉시 내국법인도 수익을 인식하도록 관련 세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역혼성단체 방지 규정을 회피할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BEPS
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 다국적 기업이 조세제도의 허점을 악용해세금을 회피하는 행위다. 이를 막기 위해 OECD가 마련한 15개 세부 과제가 2015년 G20 정상회의에서 최종 승인됐다.
■ 역혼성단체
reverse hybrid entities. 국내와 해외에서 법률적·세무적 해석이 다른 조직(단체). 한 조직이 해외에선 소득 등이 단순 이전되는 ‘도관 조직’으로 인정되지만 자국에선 독립된 실체인 법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