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은 추상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20세기 추상화의 거장 마크 로스코는 ‘사람의 감정을 유발하는 본질은 색과 면’이라고 믿었고, 국내 최초 추상화가 유영국도 ‘색채의 균형이 맞아떨어질 때 음악의 절정처럼 사람에게 자극을 준다’고 했다. 예술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요소를 계속 덜어내다 보면 형태는 사라지고, 색만 남는다.
국대호 작가(55·사진)의 작품도 그렇다. 그의 ‘스트라이프(Stripe)’ 연작에선 여러 색깔의 선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쨍한 형광 주황색, 깊고 푸른 옥색, 탁한 노란색…. 이 선들은 두께도, 질감도 서로 다르다. 아크릴 물감으로 매끈하게 마감된 선이 있는가 하면 여러 색깔의 유화 물감을 덧칠한 흔적이 느껴지거나, 나무 위에 그린 듯 거친 표면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선도 있다.
이들 선에는 작가의 지난 수십 년간의 기억이 응축돼 있다. 최근 서울 청담동 갤러리콜론비에서 만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과거의 기억을 색깔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었다”며 “형광 주황색은 다섯 살 때 철공소에 갔다가 높은 온도로 달궈진 쇠의 색깔이 예뻐서 손으로 움켜쥐었던 기억, 푸른 옥색은 처음 상경했을 때 마주했던 옛 서울역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색깔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기도 한다. 스트라이프 연작 중 하나인 ‘S2022D803’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이 서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최근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위아래로 반전시킨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에겐 캔버스의 옆면도 작품의 일부분이다. 유화 물감으로 여러 색깔을 붓으로 덧칠한 흔적이 옆면의 ‘마티에르(질감 표현)’로 고스란히 살아있다. 정면에서 보면 흰색 선이지만, 옆면을 보면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등 다양하다. 워낙 다양한 색깔을 덧대다 보니 작품을 말리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린다. 국 작가는 “사람이 구분할 수 있는 색깔은 800만여 가지”라며 “새로운 작품을 그릴 때마다 전작과 조금이라도 다른 색깔을 담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국 작가는 20년 넘게 색깔을 탐구해왔다. 1997년 프랑스 신인 미술작가의 대표 등용문인 ‘살롱 드 비트리’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색을 주제로 ‘컬러블록’ ‘컬러필드’ 등 색채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국 작가는 “누구나 좋아하는 색이 있고, 색에 대한 감정도 가지고 있다”며 “색깔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라고 강조했다.
그가 추상화만 그린 건 아니다. 그는 스트라이프 연작을 그리다가 2010년대 초반 ‘도시 시리즈’를 선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뿌옇게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로 인기를 끌었다.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을 두고 ‘자비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추상화로 다시 돌아왔을까. “가수도 젊었을 땐 화려한 기교를 부리다가 시간이 갈수록 힘을 빼고 노래를 부르듯, 화가도 계속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걷어내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엑기스’를 찾는 거죠. 음악도 문학도 그렇듯이 모든 예술이 그런 과정 아니겠어요.”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