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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타임머신을 타고 간 80만 년 뒤 지구에서 만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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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영화가 예측한 것 가운데 실제로 이뤄진 게 많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일이 수십 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것투성이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전화기를 손에 들고 다니며 통화하는 건 소설 속 일이었다. 운전자 없이 달리는 차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했으나 이미 운전석이 텅 빈 자동차가 시험 운행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주 차용되지만 실현되지 않은 대표적인 것으로 타임머신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족이 서울 도심을 활보하고, 아날로그 시대의 그와 사랑을 나누는 일은 그야말로 판타지일 뿐이다. 미래로 날아가서 체험한 기이한 일을 담은 최초의 소설은 다름 아닌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이 1895년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엽 영국에서 무의식에 대한 많은 저서가 나왔다. 꿈과 무의식, 육체이탈 체험에 대한 고찰이 넘치는 상황을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탈것을 이용한 여행’으로 구체화해 비범하고 독창적인 공상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타임머신》으로 유명해진 웰스는 《투명인간》 《우주 전쟁》 등 여러 편을 연이어 펴내 공중폭격과 화학무기, 레이저 광선, 산업견학, 우주여행, 유전자 공학, 성형수술, 지구온난화, 진동하는 우주 등의 상상을 펼쳤다.
과학발견 시대와 과학지식이 바탕
웰스가 선구적인 과학소설을 쏟아낸 건 전무후무한 과학발견이 이뤄진 빅토리아 왕조 말기라는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과학사범학교 출신으로 과학 교사, 생물학 강사를 지내며 《생물학 교본》을 낸 웰스의 해박한 과학지식도 《타임머신》을 쓰게 한 바탕이다.

21세기 사이버 소설의 원조, 사이버펑크의 대부로 불러도 무방한 웰스는 ‘당대 최고의 창작자’로 불리며 흥미로운 소설을 통해 미래를 놀랍게 예견했다.

중편소설 분량으로 그리 길지 않은 《타임머신》은 총 12부로 구성된 액자소설이다. 1부와 2부, 12부와 에필로그는 현재 상황이고 3부부터 11부는 시간여행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겪은 일을 담았다. 시간여행자가 지인들에게 “시간이 공간의 일종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네”라며 과학 얘기를 시작한다. 시간여행자가 자신이 만든 타임머신을 보여주며 레버를 움직이면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다들 반신반의한다.

레버를 누른 시간여행자는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과 흡사’하게 속력을 올린 타임머신을 타고 태양과 달, 별을 마구 지나쳐 80만2000년경의 미래에 도착한다. 거대한 건축물이 서 있는 아름다운 대지 위에 안착한 시간여행자를 매우 우아하지만 키가 120㎝밖에 안되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맞아준다. 침입자를 적대시하지 않는 그들은 호기심도 없어 시간여행자에게 곧 흥미를 잃는다. 소와 양, 개나 말 같은 동물이 공룡처럼 멸종돼 사람들은 주로 과일만 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다.

인류가 살면서 계속 안락과 안전을 고려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안정됐고, 예방학의 목표가 달성되면서 질병이 박멸돼 코로나 같은 전염병은 흔적조차 없는 땅이 됐다. 과일이 널려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모두 훌륭하게 차려입고 거닐 뿐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여행자는 경쟁도 투쟁도 없는 낙원 속의 연약하고 맥빠진 인간들이 결코 부럽지 않다.
엘로이와 몰록의 대결
타임머신이 사라져 당황하며 찾던 중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나를 구해주는 일이 발생한다. 귀여운 위나와 사랑에 빠진 시간여행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타임머신을 찾아 나선다. 누가 타임머신을 훔쳐갔으며, 그와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연약한 인간 그룹 엘로이를 위협하는 지하 괴물 몰록들의 무시무시한 정체가 드러난다. 몰록이 훔쳐간 타임머신을 찾기 위한 시간여행자의 사투도 눈물겹다. 그 과정에서 위나가 죽음을 당하고 타임머신을 겨우 찾은 시간여행자는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현실세계에 되돌아온다.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독특한 기계장치, 80만 년 뒤 완벽하지만 생동감이라곤 없는 인류의 종말 시점, 이 두 가지 놀라운 상상을 《타임머신》에 담았다. 타임머신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지구 종말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소설을 읽으며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달려가는 상상을 펼쳐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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