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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간 그들은 행복해졌을까…'첫 착륙 3인방'의 엇갈린 운명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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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강철같은 체력과 명석한 두뇌를 겸비했습니다. 판단력과 배짱은 물론 훌륭한 성품까지 갖췄지요. 젊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덕분에 불과 서른 줄에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만화 주인공같은 ‘스펙’이지요. 덕분에 당신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주 비행사가 돼 인류 최초로 달에 갈 후보로 선정된 거죠.

수 년에 걸친 지옥 같은 훈련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당신은 마침내 ‘인류 대표’로 뽑혔습니다. 달로 가는 우주선에는 당신만큼이나 뛰어난 동료 두 명이 함께 탈 예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셋 중에 한 명뿐. 두 번째로 달에 착륙한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겠지요. 심지어 나머지 한 명은 달 표면을 밟지조차 못하고 우주선에 머무르다 돌아와야 합니다. 그 심정은 얼마나 비참할까요.

지난 5일 한국의 첫 달 탐사선 ‘다누리’호가 4개월 반에 걸친 여정을 시작했죠. 달이라는 주제에 맞춰 이번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1969년 39세의 나이로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로 떠난 세 동갑내기의 엇갈린 운명을 조명합니다.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닐 암스트롱, 인류 최초로 달 밟았지만…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사람은 닐 암스트롱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학자를 꿈꿨던 그는 1947년 퍼듀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합니다. 1949년 해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6·25 전쟁에 참전했는데, 1951년 함경북도 일대에서 작전 중 전투기가 크게 손상돼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요. 이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우주산업체에서 테스트 파일럿 겸 항공공학자로 일했습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테스트파일럿 중에서도 그의 비행실력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영화 탑건의 주인공인 매버릭을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성향은 냉정하고 침착했죠. 미 항공우주국(NASA)이 그를 우주비행사로 스카웃해간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NASA에 들어간 뒤로도 그는 조종 실력을 한껏 발휘해 여러 사고를 막아내며 아폴로11호의 사령관으로 뽑혔지요. 이런 NASA의 안목은 적중했습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당시 분화구에 빠질 뻔 했는데, 위기를 암스트롱의 수동 조종 덕분에 넘긴 거죠.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멋진 말을 남기고 지구로 돌아온 암스트롱.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암스트롱의 삶은 점차 망가져 갔습니다. 언론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과도한 관심을 보였고, 수많은 스토커들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달 착륙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이 해코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원래부터 대중의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점차 염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NASA에서 은퇴한 뒤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지내다가 1979년에 갑작스레 퇴직한 것도, 1994년 부인과의 이혼에도 이런 성격 변화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유명세는 여전했는데요, 암스트롱은 2005년에는 단골 이발소의 이발사가 바닥에 떨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훔쳐 3000달러(약 390만원)에 팔아넘기는 배신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작은 농장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201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1등만 기억한다고? 토이스토리 ‘버즈’ 모델이 이 사람

예전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꽤 인기가 있어서 칼럼 등 다양한 글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지요. 가장 많이 언급됐던 예시가 “닐 암스트롱 다음으로 달에 간 사람 이름을 누가 기억하느냐”는 얘기였습니다. 영화 ‘세 얼간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 걸 보면 외국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2등’ 버즈 올드린을 기억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친숙하죠. 교과서에도 나오니까요.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의 캐릭터 ‘버즈 라이트이어’도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입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에는 버즈 올드린이 아폴로 11호 임무에서 입었던 우주복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77만2500달러(약 35억4600만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올드린도 암스트롱 못지 않은 ‘엄친아’였습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전체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뒤 공군에 들어갔습니다. 조종사가 돼 F-86 전투기를 몰았고 6·25전쟁에 참전해 MiG-15기 두 대를 격추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지요.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메사추세츠 공대(MIT)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고, 우주선 궤도와 관련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그의 여러 연구는 오늘날 우주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NASA 우주비행사가 된 올드린은 1969년 아폴로 11호에 탑승할 세 명 중 하나로 선정됩니다. 올드린은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성격이었던지라 ‘1등’으로 달에 발을 딛고 싶다는 욕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올드린과 암스트롱 사이에서는 종종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신경전이 별 효과는 없었던지 예정대로 두 번째로 달을 밟게 된 올드린. 그는 암스트롱만큼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타이틀을 몇 개 챙겼습니다. ‘달에서 처음으로 소변을 본 인간’, ‘달에서 처음으로 성찬식을 한 인간’ 등이지요.

지구로 돌아온 올드린은 NASA의 대변인을 맡는 등 우주 개발을 홍보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쾌활한 성격으로 인기도 좋았죠. 하지만 그의 삶도 점차 망가져가기 시작합니다. 달착륙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여러 개인적인 불운이 겹쳤습니다. ‘이제 다시는 우주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도 그를 좀먹었습니다. 결국 올드린은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이혼까지 겪게 됩니다.

다행히도 올드린은 알코올중독을 이겨내고 재활에 성공합니다. 이후 우주 개발과 관련해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 등을 하며 92세가 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15년 9월에는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했지요. 그는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3인방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비운의 우주인’? 뒷이야기는 달랐다

정말로 ‘잊힌 우주인’은 마이클 콜린스입니다. 암스트롱, 올드린과 함께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했지만 달 표면에 내려보지도 못하고 다시 지구로 돌아왔거든요. 그는 사령선인 컬럼비아호를 조종하면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습니다. 동료들이 달에 착륙해 기쁨을 나누던 역사적 순간, 그는 홀로 달 궤도를 돌며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콜린스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 파일럿을 거쳐 NASA 우주비행사가 됐습니다. 아폴로 11호에 탑승할 우주비행사 중 그의 서열은 암스트롱 다음인 2등이었습니다. 달에 착륙할 자격은 충분했단 얘기죠. 하지만 우주비행사 두 사람이 달에 착륙해 돌아다니는 동안 누군가는 달 궤도를 돌며 이들을 다시 데려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3등인 올드린은 그 임무를 맡기에 경력이 부족했고요. 결국 콜린스가 우주선에 남기로 결정됩니다.

여러 인터뷰와 자서전 등에서 그는 “다소 실망했다. 하지만 동료들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도 달 착륙만큼이나 중요한 임무기 때문에 금새 아쉬움을 털어버렸다”고 돌아봅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지요.

궤도를 돌던 우주선이 달의 뒷면을 지나는 48분 동안에는 모든 통신이 끊기는 경험도 했는데요, 호사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외로웠던 사람’ ‘자신이 태어난 행성을 볼 수 없었던 유일한 사람’ 등의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정작 본인은 “기분이 참 좋았고 커피도 한 잔 했다”고 하는데, 성격 한번 담백하죠.


콜린스는 지구로 돌아온 이듬해인 1970년 NASA를 그만둡니다. 사실 그는 달에 한번 더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력 순환 계획에 따라 3년 뒤 아폴로17호의 사령관이 돼 달을 밟게 될 예정이었죠. 하지만 그는 “관심도 싫고 우주비행사 훈련도 싫다”며 ‘쿨’하게 포기합니다.

이후 그는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와 국립항공우주박물관장 등을 지냈습니다. 2019년 달 착륙 50년이 되던 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 때도 그는 쿨하게 “운이 좋았을 뿐이며 우주비행사는 영웅이 아니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지난해 4월 향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콜린스는 평온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인 패트리샤 피네건이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7년을 금슬 좋은 부부로 지냈고, 세 명의 자녀와 일곱 명의 손주를 봤습니다. 말년에는 고향 호숫가에서 수채화를 그리거나 낚시를 즐겼습니다.
운명의 반전
1930년생 동갑내기 암스트롱과 올드린, 콜린스는 모두 탁월한 우주비행사이자 모든 면에서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향해 함께 온 힘을 쏟았지요.

하지만 세 사람의 운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암스트롱은 그 탓에 많은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올드린은 오랜 세월 방황해야 했고요. 정작 ‘불쌍하다’는 동정까지 받았던 콜린스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고 순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쉽게 재단하고 줄 세울 수는 없겠지만 그야말로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 착륙만큼이나 중요한 일조차 결국엔 지나가고, 어찌 됐든 삶은 계속됩니다. 지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좌절을 겪고 있는 분들께 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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