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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복판 '족쇄찬 장미'…벽에 피어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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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산대로에 있는 아티스트컴퍼니 건물 한쪽 벽면엔 14m 길이의 장미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쇠로 된 족쇄가 줄기를 옥죄고 있지만 장미꽃은 꼿꼿하게 줄기를 세우고 있다. 족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굴하지 말라(Rise Above)’.

대형 장미꽃이 그려진 곳은 여기뿐만 아니다. 서울 신천동 롯데월드몰 빌딩 벽엔 푸른 지구 위에 장미꽃이 피어 있고, 석촌호수 인근 갤러리 호수엔 지혜와 번영을 상징하는 코끼리 옆에 장미꽃이 놓여 있다. 롯데월드타워 1층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저울이 장미꽃을 떠받치고 있다.
20번 체포돼도 길거리 예술 고집
이들 벽화는 미국 길거리 예술가 셰퍼드 페어리(52·미국)의 작품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한 전시회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를 위해 방한한 그는 서울 시내 다섯 곳에 벽화를 남겼다. 페어리는 환경파괴, 인종·성차별, 전쟁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앤디 워홀 작품처럼 실크스크린 기법과 콜라주를 사용해 포스터 같은 느낌을 준다.

페어리는 2008년 미국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의 초상화 포스터 ‘희망(HOPE)’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미국 국기 색인 빨간색과 파란색 배경 위에 오바마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새겨 넣은 작품을 포스터와 스티커로 제작해 무료로 배포했고, 오바마 캠프는 이 작품을 공식 캠페인 포스터로 선정했다.

그에게 길거리는 작업실이자 전시장이다. 페어리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 일본, 홍콩,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돌아다니며 고층 건물과 광고판에 그림을 그렸다. 불법 그라피티로 경찰에 20번 넘게 체포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길거리 예술을 고수했다. 페어리는 전시회 개막 전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이 미술관에만 머물지 않고 거리로 나갈 때 비로소 대중과 연결될 수 있다”며 “작품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로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지닌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각성하고, 포용하고, 행동하라”
이번에 서울 곳곳에 그려넣은 장미는 그에게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부당한 현실을 이겨내는 희망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푸른 행성 위에 피어난 꽃은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롯데월드몰 벽화 ‘아이즈 오픈’에서 행성 밑부분에 그려진 눈동자는 환경이 파괴되는 지구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성수동 ‘피치스 도원’에 그린 스텐실 벽화 ‘오베이 자이언트’에는 페어리가 2001년 만든 패션 브랜드 ‘오베이’의 상징인 프랑스의 전설적 프로레슬러 앙드레 르네 루시모프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위압적인 눈빛과 굳게 다문 입 밑에 ‘OBEY(복종하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작품은 보는 이에게 무엇에 복종하라는 건지 의문이 들게 한다.

페어리는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이번 전시회에 내건 47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진다.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은 ‘피스 걸’(2005년), 인종 및 성차별에 당당히 맞서는 이들을 표현한 ‘안젤라 누비안’(2019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회의 부제가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Eyes open, Minds open)’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문제를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행동도 중요하다. 페어리는 전시회 등으로 얻은 수익을 환경 및 인권활동가에게 수시로 기부한다. 그는 전시회 벽에 새긴 문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희망 없이는 행동할 이유가 없고, 행동은 내 철학의 중요한 요소다.” 전시는 오는 11월 6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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