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정책이 없었다면 광화문에서 1인 시위할 시간에 소형모듈원자로(SMR) 연구를 하지 않았을까요.…”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조재완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조씨는 경수로형 원전 안전을 보장하는 핵심 기술인 열수력 계통 연구자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탈원전 정책의 문제점을 알리는 사회 활동에 집중하느라 학업에 전념하지 못했다. 조씨는 “연구개발(R&D) 분야에 있는 게 회의가 들어 진로를 바꿀 생각”이라며 “법과 절차, 과학을 무시하고 탈원전을 강행한 책임자들이 모두 대가를 확실하게 치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원전 세일즈 외교를 펼치는 등 ‘원전 산업 부활’을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을 일굴 ‘연구 생태계’가 되살리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존 산업현장의 원전 엘리트들이 무더기로 중국과 중동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데 이어 주요 대학 원자력 학과가 존폐 위기에 처하면서 후속 전문인력들이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1일 KAIST에 따르면 올해 이 대학 원자력 학부 전공 지원생은 4명에 그쳤다. 탈원전 시작 직전인 2016년 22명의 18%로 급감했다. 단국대는 원자력 전공이 다른 과에 통폐합되면서 사라졌다. 중앙대는 현 4학년생 31명 전원이 최근 “대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밝혀 학내 파문이 일었다.
미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이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SMR 연구도 국내 대학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SMR은 대형 원전 대비 크기와 출력을 3분의 1 이하로 줄이고 안전성을 높인 차세대 원전이다. 영국 국립원자력연구소에 따르면 SMR은 2035년 세계 시장 규모가 약 62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최근 주요7개국(G7) 정상회담에서 탄소중립 에너지원으로 SMR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SMR 개발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기업 뉴스케일파워는 지난달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김성중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SMR 같은 ‘게임체인저’ 기술은 대학에서 꾸준히 인력을 양성하고 배출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탈원전으로 족히 20년은 손해를 봤다”고 지적했다.
"용융염원자로(MSR) 개발 골든타임 놓쳤다"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 파이로-SFR도 마찬가지
우라늄 등 핵연료와 불화리튬·지르코늄, 염화나트륨 등 냉각재가 한 곳에 용암처럼 섞여 있는 용융염원자로(MSR)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독특한 원자로’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청정 에너지원으로 연일 강조하고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일종인 MSR은 중대사고 위험이 극히 낮고, 그린수소 생산까지 가능하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이 2010년을 전후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9~2030년께 상용화가 예상된다.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 파이로-SFR도 마찬가지
글로벌 탄소배출 규제가 심화되고 있는 조선업계에서도 MSR을 차세대 동력원으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서슬이 퍼렇던 지난 5년간 손도 못 대다 지난해 들어서야 일부 기초 연구가 시작됐다. 김성중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확연히 감소한 것은 물론 기존에 남아있는 인력도 의욕을 잃었다”며 “SMR 기술을 한창 연구해야 할 시기에 골든타임을 놓친 것 같다”고 우려했다.
원전 기술 ‘끝판왕’으로 불리는, 미 오크리지국립연구소 출신들이 세운 스타트업 쏘콘(Thorcon)이 MSR 상용화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가운데 캐나다 테레스티얼, 영국 몰텍스 등이 개발에 한창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의 에너지 기업 테라파워도 MSR 개발에 뛰어들었다.
MSR과 같은 미래 기술을 세상에 내놓는 데 있어 장기적 대학 연구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뉴스케일파워다. 뉴스케일은 미국 연구중심 대학인 오리건주립대가 개발한 원천기술을 이전받아 비경수로형 SMR 상용화를 목전에 뒀다. 미국 에너지부(DOE)가 상용화를 전폭 지원했으며 그동안 약 2조원의 민·관 자금이 들어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시공 기술을 토대로 뉴스케일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지만, 부가가치가 큰 설계 기술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 대학은 지난 5년간 SMR 연구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우악스럽게 밀어붙인 탈원전 정책으로 기존 기술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던 때, 미래기술에 대한 투자는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중인 구자현씨는 “대학은 SMR같이 상용화가 이뤄지지 않은 미래 기술에 전념하는 게 맞다”며 “원전 연구자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란 낙인이 찍힌 탓에 다들 사기가 떨어져 연구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한국이 미국과 세계 최초로 개발중인 폐연료봉(사용후핵연료) 재활용 기술 ‘파이로-SFR’도 상용화 시기가 탈원전 정책 탓에 늦춰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이로-SFR은 폐연료봉 가운데 1%가량의 초우라늄(TRU)을 추출해 SMR의 일종인 소듐냉각고속로(SFR)에 연료로 넣어 재활용하는 기술이다. TRU는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비롯해 수억 년이 지나도 치명적 방사선이 사라지지 않는 아메리슘, 퀴륨, 넵투늄 등을 말한다.
파이로-SFR은 1997년부터 한·미 연구진이 개발해왔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해인 2017년 말 돌연 ‘재검토’ 결정이 내려지면서 먼 길을 돌아야했다. 지난해 말 가까스로 한미 당국의 파이로-SFR 연구를 집대성한 연구보고서가 나오면서 기술적 타당성과 핵 비확산성 등이 재차 검증됐다. 그러나 ‘탈원전’을 적극 지지한 임혜숙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재임시 소집된 외부 검토위원회는 보고서에 대해 “사회적 수용성을 고려할 때 경제성이 불확실하다”는 모호한 해석을 내렸다.
원자력연구원 선진핵주기시스템연구부에서 석·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윤선광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연구원은 “파이로-SFR 연구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예산이 삭감되고 연구 역량이 분산되면서 엄청난 비효율이 생겼다”며 “소수 비전문가가 국가 에너지 정책을 왜곡하는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황폐화된 대학 원전 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해선 기업과 연계해 실험용 원자로 공급 등 학부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자력 장학제도를 신설하고 해외 대학 연계 연구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억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원자력학과장은 “SMR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할 텐데, 이런 기술의 가장 밑바닥(기초)을 만들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많이 부족해보인다”며 “바닥이 무너지면 순서대로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내 원자력 발전 관련 전공 학과는 탈원전 정책 5년을 거치면서 말 그대로 빈사 상태로 내몰렸다. 일부 대학에선 전공 자체가 통폐합되거나 학생 정원이 대폭 줄어드는 등 인력 육성 체계가 무너졌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향후 원자력 산업을 이끌 한 세대의 엘리트가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원전 업계에 따르면 단국대 원자력융합공학과는 2019년 신입생 입학을 끝으로 이듬해 에너지공학과와 통폐합됐다. 기존 원자력융합공학과 학부생들은 2020년 1학기부터 에너지공학과로 학적이 바뀌었다. 일부 학생들은 공과대학 내 타 학과로 전과를 하면서 한 학번에 40여명 정도였던 학생 수는 30명대로 줄었다.
대학원에선 강의조차 열리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원 진학생이 크게 줄면서 강의 개설을 위한 최소 인원을 채우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이 대학원 석사 과정 A씨는 “학기당 일반적으로 3개 과목을 수강해야 하는데 수업 자체가 열리지 않아 2년 동안 3개 과목만 수강했다”고 하소연했다.
중앙대는 에너지시스템공학부 내 원자력 세부 전공을 지망한 학생 수가 최근 5년간 평균 10명이 안 되는 상황이다. 2016년과 비교해 반토막 났다. 김동억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원자력 산업 인재 수급 문제가 크게 불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50명 수준이었던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신입생 수는 탈원전 정책 도입 이후 30명 대까지 내려앉았다. 부산대 기계공학부 원자력시스템 전공 대학원 역시 탈원전 이후 학생 수가 40%가량 감소했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탈원전 정책 충격으로 지역 대학의 원자력학과를 더는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내몰렸다”고 전했다.
원자력 분야를 전공한 전문 인력이 원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 수준이다. 나머지는 건설, 전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신규 원전 사업이 크게 줄면서 원전 산업 종사자 대부분이 업종 전환에 나섰지만, 전문 연구인력만큼은 일감을 거의 잃다시피 했다. 특히 대학 중심으로 이뤄지는 원전 관련 신기술 개발의 맥이 끊겼다. 기초 연구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원전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재성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박사 과정 재학생은 “HTR(고온가스로), MSR(용융염원자로) 등 차세대 원전을 놓고 봤을 때 미국의 연구개발 및 시공 능력 수준을 100점 이라고 본다면 한국은 30점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원전 관련 투자가 한국의 다섯 배가 넘는 중국은 최근 자국 원전 브랜드인 ‘화룽’을 완성하는 등 원전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지난 정부에선 원전 해체, 안전, 방사선 분야를 제외한 원전 신기술 개발은 전면 중단됐다”며 “전문 인력이 원전 유지보수 등 현상 유지를 위한 일에만 투입되다 보니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원전 인력 육성 체계의 붕괴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2018년 3276명이었던 원자력 관련 학과 학·석·박사 재학생은 지난해 2165명으로 3년만에 33.9% 줄었다. 원자력 관련 학과 신입생 수는 2015년 583명에서 지난해 395명까지 떨어졌다.
취업 인원도 반토막 났다. 2017년 142명인 원자력 전공 학사 취업자는 2020년 77명으로 감소했다. 석사 학위 소지자도 같은 기간 74명에서 44명으로 취업자가 대폭 위축됐다.
이해성/김진원/민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