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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열정·참신…기립박수 받은 유자 왕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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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을 작곡가, 시대, 스타일 등 정해진 틀 안에서 감상하기보다는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겨주셨으면 하는 연주자의 바람입니다. 프로그램이 변경될 예정입니다. 관객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유자 왕은 관객분들께 사랑의 마음을 담아 슈베르트의 ‘liebesbotschaft(사랑의 전령)’로 공연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공연 시간에 맞춰 무대에 환한 조명이 비친 후 들려온 장내 멘트입니다. ‘이건 뭐지?’ 싶었습니다. 클래식 음악회에서 이런 멘트를 듣는 것은 처음입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16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유자 왕의 첫 내한 리사이틀 두 번째 공연 현장입니다.

공연장에 도착해 만난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로부터 “어제 첫 공연(대구 달서아트센터)에서 베토벤 소나타 18번 빼고 슈베르트 ‘마왕’ 연주했다고 한다. 마음대로 연주곡과 순서 바꿔 연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날 공연의 주최 측인 고양문화재단 관계자로부터는 “프로그램이 절반가량 바뀐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알려주지 않아 사전 공지를 못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변경 전 프로그램 중에는 베토벤 18번이 단연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연주곡들에 비해 한 세기 이상 앞선, 작곡가·시대·스타일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이었습니다. 근현대음악을 선호하는 유자 왕이 베토벤 소나타 32곡 중에 왜 18번을 골랐을까, ‘사냥’이란 부제가 붙은 이 곡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 들려줄까 궁금했습니다. 저같은 궁금증을 안고 온 관객들은 프로그램 변경에 큰 불만을 가졌을 법합니다. 프로그램북에 ‘공연 당일 연주자의 사정으로 사전 공지 없이 프로그램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란 문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1부 메인 곡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연주회에서 연주 시간이 가장 긴 곡을, 일반 관객이라면 가장 기대했을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듣던 대로 자유로운 영혼인 유자 왕답구나’ 싶으면서도 ‘연주자의 바람’을 담은 친절한 안내멘트가 곱지 않게 들린 까닭입니다.



유자 왕이 등장합니다. 연주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과감한 노출의 드레스와 높은 굽의 킬힐 차림입니다. 예고대로 슈베르트 마지막 가곡집 ‘백조의 노래’의 첫 곡인 ‘사랑의 전령’으로 포문을 엽니다. 시냇물이 물결치는 듯한 오른손의 반주에 ‘사랑의 마음이 담긴’ 듯한 왼손의 멜로디가 실립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 환경을 갖춘 아람음악당에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 마음의 불만이 옅어졌습니다.

이제부턴 연주자가 어떤 곡을 연주할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무대입니다. 마치 즉흥 연주를 듣는 듯한 긴장감과 묘미가 느껴졌습니다. 유자 왕은 같은 가곡집에 실린 ‘안식처(aufenthalt)’에 이어 ’마왕(erlkonig)‘까지, 리스트가 편곡한 슈베르트 가곡 세 편을 연달아 연주했습니다. 호쾌한 타건과 섬세한 다이내믹으로 들려주는 극적인 표현력이 일품이었습니다.

잠시 후 연주한 곡은 다행히도(?) 프로그램에 있던 쇤베르크의 ‘피아노 모음곡, 작품번호 25’입니다. 작곡가의 12음 작곡법과 음렬주의를 바로크 시대 춤 모음곡 형식으로 전개한 작품입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감상용 작품으로 실릴 만큼 현대음악의 고전이 됐지만 제게는 여전히 듣기 쉽지 않은 곡입니다. 유자 왕은 한 음 한 음 탐구하는 듯이 진지한 태도로 건반을 짚어나갔습니다. 템포는 다소 빠른 듯했습니다. 12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모음곡을 완주했습니다.

친근한 선율의 슈베르트의 ‘헝가리 멜로디 b단조’를 간주곡처럼 들려준 후 역시 프로그램에 있는 리게티의 연습곡 6번 ‘바르샤바의 가을’과 13번 ‘악마의 계단’을 연주했습니다. 유자 왕의 장기인 듯싶었습니다. 연주자의 가공할 만한 테크닉으로 현대 피아노가 낼 수 있는 음역과 음량의 진폭을 만끽했습니다.

2부가 시작됐습니다. 이번엔 장내 방송이 먼저 연주자가 연주할 작곡가 순서를 알려줍니다. ‘스크랴빈-솔레르-스카를라티-멘델스존/라흐마니노프-라모-알베니즈’. 이어지는 멘트는 대략 이랬습니다. “스크랴빈의 소나타 3번으로 시작하며 연이어 g마이너 곡들을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마드리드의 노동자들이 살던 라바피에스의 혼잡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담아낸 알베니즈의 이베리아의 모음곡 3권 3번 라바피에스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공지된 2부 프로그램 중 알베니즈의 ‘말라가’와 우크라이나 작곡가 카푸스틴의 전주곡 두 곡이 빠졌지만 메인 곡이라 할 수 있는 스크랴빈 소나타 3번과 라바피에스가 살아남았습니다.

먼저 제가 베토벤 18번만큼 기대하고 왔던 스크랴빈 3번입니다. ‘러시아의 쇼팽‘으로 불린 작곡가의 낭만적인 선율과 ‘점묘주의’로 불리는 모호하고 아리송한 선율이 함께 숨 쉬는 명곡입니다. 유자 왕은 숨 막힐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꿈결 같은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g단조 메들리’는 제가 이번 리사이틀에서 가장 경탄해 마지않은 연주였습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해서 들었습니다. 솔레르의 소나타 g단조, D.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K450, 멘델스존/라흐마니노프의 ‘한여름 밤의 꿈’ 중 스케르초, 라모의 ‘야만인(le sauvage)’를 연속해서 연주했습니다. g단조를 매개로 해서 시대와 장소, 성격이 다른 곡들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결해 펼쳐냅니다. 연주자의 바람대로 작곡가, 시대, 스타일 등 정해진 틀 안에서 감상하지 않고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겼습니다. 마지막 곡 ‘라바피에스’에서는 이국적인 색채와 흥취, 리듬을 생동감 있게 들려줬습니다. 흥과 신이 절로 났습니다.

약 40분간의 2부 공연 동안 잠시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던 유자 왕은 흥이 제대로 오른 듯 보였습니다. 곧바로 앙코르 무대가 이어졌습니다. 귀에 착착 감기는 선율들을 굉장한 속도와 파워로 쏟아냅니다. 박수갈채가 이어지면서 앙코르도 계속됩니다. 말 그대로 즉흥적입니다. 전자 악보 태블릿에서 잠시 고민하며 곡을 고르는 모습에 객석에선 웃음과 환호를 보냅니다. 몇 곡을 들려주었는지 헤아리다 멈췄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열정 넘치는 연주에 빠져들었습니다.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7번 피날레 악장 ‘프레치타토(Precipitato)’가 앙코르 무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프레치타토는 급하게 치라는 지시어인데 그야말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다녔습니다. ‘프로코피예프가 저렇게 쳐서 관중을 열광케 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 30분간 계속된 앙코르 무대는 기립박수로 막을 내렸습니다. 대단합니다. 저도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받은 앙코르 목록은 이렇습니다. <마르케스 ‘단손’ 2번, 브람스/치프라 ‘헝가리 무곡’ 5번, 바흐/치프리앙 카차리스 ‘바디네리’, 슈베르트/리스트 ‘물 위에서 노래함’, 리스트 ‘샘가에서’,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중 ‘네 마리 백조의 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피날레, 비제/호로비츠 ‘카르멘 주제에 의한 변주곡’.> 모두 여덟 곡입니다.

유자 왕이 연주 외적인 파격과 논란에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페스티벌 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초청받고 환영받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연주자의 톡톡 튀는 개성과 열정, 뛰어난 연주력과 함께 음악성의 깊이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흥적인 현장성의 흥분과 음악적인 감동을 안기는 무대였습니다. 연주 스타일과 임의적인 프로그램 구성에는 여전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이번 첫 내한 리사이틀을 계기로 국내에 유자 왕 팬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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