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함정에 빠졌다는 경고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인플레이션(inflatioin)을 합친 경제 용어.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 불황을 뜻한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 경기를 살리자니 물가를 더 자극할 것 같고, 물가를 잡자니 경기가 더 침체하는 정책 딜레마 때문이다.
블룸버그·WB·OECD의 경고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평균 9.2%로 치솟았다고 보도했다. 1998년 9월(9.3%) 이후 최고치다. G7(주요 7개국) 회원국 중 일본을 제외한 6개 나라의 물가 상승률은 1980년대~1990년대 초 이후 가장 높다. 미국은 지난달 40년 만에 최고치인 8.6%를 기록했다.이런 가운데 최근 세계은행(WB)은 올해의 세계 경제 성장률(GDP 증가율) 전망치를 당초 4.1%에서 2.9%로 낮췄다. OECD도 4.5%에서 3.0%로 하향 조정했다. OECD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했다. OECD가 전망한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4.8%, 경제성장률은 2.7%다. 경제 전망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저성장과 고물가가 겹치는 최악의 조합, 스태그플레이션이다.
필립스 곡선 깨뜨린 스태그플레이션
세계은행은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당시 세계 경제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함정에 빠졌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생산비용이 폭등했다. 경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어 실업률을 끌어올렸다. 원유가격 폭등→비용 상승→고용 악화→불경기 심화 사이클이 나타났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런 현상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불렀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학적으로 ‘단기적으로는 물가 상승과 실업 사이에 상충관계가 있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즉 ‘필립스곡선(Phillips curve)’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립스곡선은 영국에서 활동한 뉴질랜드 출신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의 이름에서 왔다. 1958년 필립스 교수는 ‘1861~1957년 영국의 실업률과 명목임금 변화율’이라는 논문에서 실업률과 명목임금 상승률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있다고 했다. 이후 명목임금 상승률 대신 물가상승률을 집어넣어도 비슷한 관계가 성립한다는 연구 결과가 잇달아 나왔다.
프리드먼은 필립스곡선에 이의를 제기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 간에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지 않고 필립스곡선은 수직이 된다고 했다. 장기적으로 물가상승률이 얼마가 되든, 실업률은 노동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자연실업률로 수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2월 장용성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생산, 고용, 물가 관계의 변화’ 논문에서 물가가 오르는데 실업률이 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장 교수는 1990년대까지 필립스곡선이 약하게나마 유지된 듯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필립스곡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민간 소비 감소와 투자 위축 등 수요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엔 물가와 고용이 상충관계(수요견인 인플레이션)를 보이지만 유가 상승 등 공급 측면의 충격이 발생하면 물가와 고용이 동시에 악화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유와 가스가격 급등처럼 비용이 견인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말한 것이다.
물가와 고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
지금의 경제 상황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지난 9일 “잠재성장률 이상으로 경제가 성장할 것으로 본다”며 “스태그플레이션 확률은 낮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기준금리를 인상해서 물가부터 잡아야 한다고 말해 미묘한 인식 차이를 드러냈다. 미국에선 스태그플레이션 경고가 일반화한 상황이다.스태그플레이션은 물가와 고용이라는 두 토끼를 잡을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정부와 중앙은행에 던진다. 물가가 더 뛰면 과거 20%에 달했던 미국 물가를 고금리라는 극약 처방으로 잡은 ‘제2의 폴 볼커’가 등장할까? 급격한 금리 인상 처방엔 반응들이 엇갈린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국제 원자재 가격부터 안정시켜야 한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는 듯하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