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거품)경제가 붕괴한 1990년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5896달러로 세계 8위였다. 한국은 6610달러로 42위, 일본과의 차이는 4배에 달했다. 2000년 일본의 1인당 GDP는 3만9173달러로 세계 2위까지 상승했다. 한국은 1만2263달러로 10년 만에 2배 늘었지만 세계 순위는 35위였다. 일본과의 차이도 3배가 넘었다.
2021년 일본의 1인당 GDP는 3만9340달러로 세계 28위, 한국은 3만3801달러로 세계 30위였다. 한국이 일본을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던 건 1인당 GDP가 20년새 3배 가까이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정체가 심각했던 탓이 더 컸다
선진국으로 보기 힘든 각종 지표
2012년 4만9175달러까지 늘었던 일본의 1인당 GDP는 9년 만에 19% 감소했다. 세계 순위가 20년 만에 이렇게 추락한 나라는 선진국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다.세계 3대 경제대국, 선진 7개국(G7)의 일원인 일본 내부에서조차 "눈 깜짝할 사이 후진국이 됐다"(2021년 4월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라거나 "쇠퇴도상국이자 발전정체국"(데라사키 아키라 정보통신진흥회 이사장의 2021년 산케이신문 기고문)이라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총생산(GDP)의 256%까지 불어나 G7 가운데 단연 최악인 국가부채 비율은 일본의 미래 또한 밝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력 순위 27위(한국 8위), 전자정부 순위 14위(한국 2위), 종합 국가경쟁력 순위 31위(한국 23위) 등 미래 경쟁력 부문에서 일본은 도저히 선진국이라고 보기 힘든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있다.
국제연합(UN)의 2021년 지속가능한 발전 달성도에서도 일본은 19위(한국 27위)로 매년 순위가 떨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이 앞서 나가는 5세대(5G) 통신규격 경쟁에는 뛰어들지도 못했고, 특기였던 반도체는 미국·한국·대만에 뒤처졌다"며 "전기자동차 전환이 한참 늦은 데다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유럽·중국과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국제경쟁력 전 분야서 후퇴
일본이 세계 경쟁에서 밀려나는 분야는 경제만이 아니다. 보석 기간 중 악기 상자에 숨어 레바논으로 탈출한 '세기의 탈주극'으로 주목받은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은 각종 언론 인터뷰마다 일본 사법제도의 후진성을 비판한다.
"일본에서 재판을 받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는 걸 깨달았을 때 도주를 결심했다. 일본 형사재판은 99.4%가 유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라며 도주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닛산 회장으로 재직한 8년간 91억엔(약 871억원)의 보수를 줄여서 신고하고 회사돈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 그가 피해자 행세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국제사회도 곤 회장의 주장에 일부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국제연합(UN) 전문가 그룹은 "카를로스 곤이 일본에서 4차례에 걸쳐 구속·구류된 과정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며 "무죄추정의 원칙 측면에서 그의 권리는 침해 당했다"는 보고서를 냈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의자는 구속 6개월 이내에 재판을 받거나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구속기간에 제한이 없어 피의자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1995년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킨 옴 진리교 핵심 관계자들이 2011년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 16년이 걸린 사례도 있다. 사린가스 사건은 사이비 종교단체인 옴 진리교 신자들이 출근길 도쿄 지하철에 맹독성 가스인 사린을 살포해 13명이 사망하고 6300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곤 회장의 측근인 그레그 케리 전 닛산자동차 대표는 지난 3월 도쿄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기까지 3년4개월간 구속됐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일본 사법제도의 복잡함과 선진국 사법제도와의 격차를 세계에 노출시켰다"고 지적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고도 '환경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자성도 나온다. 일본은 세계 5위 이산화탄소 배출국이지만 시대의 조류인 탈석탄사회 실현을 선언한 건 120번째였다. '인권 후진국'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홍콩의 인권 탄압, 미얀마군의 쿠데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놓고 일본은 미국 유럽에 비해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1975~1989년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신약을 개발한 '바이오 강국'의 지위를 잃은 지도 오래다. 코로나19 백신을 자체 개발하는데 실패하면서 일본의 백신 접종률은 한동안 세계 100위권을 맴돌았다.
일본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 '교육 경쟁력'도 흔들리고 있다. 문부과학성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의 인구 100만명 당 박사 학위 취득자는 2008년 131명에서 2018년 120명으로 줄었다.
100만명당 박사 학위 소지자가 약 400명인 영국과 300여명인 독일 한국 미국을 크게 밑돌았다. 주요국 가운데 박사 비율이 줄어든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2007년 연간 276명이었던 미국 박사 취득자는 2017년 117명으로 줄었다. 국가별 순위도 21위까지 떨어졌다. 1990년대 전반까지 세계 3위였던 우수 과학논문 순위도 2018년 10위로 떨어졌다.
세계 최하위권인 남녀평등 지수
선진국 탈락을 막으려 몸부림치는 일본의 발목을 잡아끄는 또다른 후진성은 남녀 격차다. 2021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남녀평등지수에서 일본은 120위(한국 102위)로 아랍 국가들을 제외하면 최하위권이었다.
일본의 여성 국회의원(중의원 기준) 비율은 9.67%로 세계 165위다. 여성 의사(21.9%), 판사(22.6%), 학교장(16.4%) 비율도 선진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2021년 국가 공무원 채용 종합직 시험(한국의 행정고시)에서 여성 응시자 비율(40.3%)과 합격율(35.4%)은 모두 사상 최고치를 나타냈지만 사무차관과 국장 등 고위 관료의 여성 비율은 4.4%에 불과했다. 2005년의 1.1%에 비해 크게 늘었지만 2025년까지 여성 고위 관료를 8%까지 늘리려는 일본 정부 목표와의 괴리는 크다.
여성 과장의 비율도 5.9%에 불과하다. 민간 기업의 여성 임원 및 관리직 비율 역시 14.8%(2019년 기준)로 선진국에 뒤처져 있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2030년까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30%까지 높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20명에 달하는 게이단렌 부회장 가운데 여성은 1명(난바 도모코 DeNA 회장) 뿐이다.
일본 남성 근로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22.2%인데 반해 여성 근로자는 54.4%가 비정규직이다.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의 77.5%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인 88.4%를 크게 밑돈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2020년까지 5년간 일본은행 정책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낸 하라다 유타카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오늘날 일본은 청나라 말기를 닮았다"고 말했다. 하라다 교수는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배 이후 7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며 "제대로 돌아가는게 없는 일본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하염없이 쇠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