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계가 ‘바스키아 스캔들’로 들썩이고 있다. 1980년대 미국 화단에 화려하게 등장해 스물여덟에 요절한 흑인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의 작품이 위작 시비에 휘말리면서다.
미 연방수사국(FBI)는 현재 전시 중인 올랜도 미술관의 바스키아 작품 25점의 위작 여부를 수사 중이다. 앞서 지난 25일(현지시간) 미 플로리다 팜비치의 아트딜러 다니엘 엘리 부아지즈는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뱅크시 등의 위작을 인터넷으로 싸게 사 5배 이상 부풀린 가격에 속여 판 혐의로 미 플로리다 법원에 기소됐다.
바스키아의 그림이 FBI의 수사 대상이 된 건 수년간 치솟은 몸값 때문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 크리스티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작품 ‘인 디스 케이스(1983)’는 9310만달러(약 1010억원)에 낙찰됐다. 바스키아 작품으로 역대 2위. 최고가는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경매 역사상 최고가 1200억원에 팔린 ‘무제(1982)’ 였다.
올랜도 미술관은 지난 2월부터 ‘영웅&괴물: 장 미셸 바스키아’라는 타이틀로 바스키아의 그림 25점을 전시 중이다. 지난 40년간 미공개된 작품이 대부분. 미술관 측은 아트 딜러 래리 가고시안의 자택 지하 스튜디오에서 지내던 1982년 말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미술관 측은 바스키아가 30년 전 TV시나리오 작가인 새드 멈포드에서 현금 5000달러(약 630만원)에 팔았고, 멈포드는 자신의 로스앤젤레스 지하 창고에 넣어둔 채 잊고 있다가 창고 보관료를 낼 수 없게된 2012년 경매 시장에 내놓은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들은 헐리우드 유명 변호사 등 여러 소장자가 낙찰 받았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진품이라면 추정 가격은 1250억원. 바스키아의 작품이 경매 시장에서 화제가 되고, 그와 협업한 앤디 워홀도 최근 재조명되면서 올랜도 미술관은 지난 몇 달간 문전성시였다.
페덱스 포장박스가 진위 여부 가르는 열쇠
전시가 흥행하며 분위기는 달라졌다. 미술관은 "유명 감정사 등을 통해 철저한 감정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을 비롯한 미술계 전문가들은 전시 개막 직후부터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30년간 창고 속 작품을 잊고 있었다'는 소장자의 증언과 이후의 유통 과정도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논란의 핵심은 택배박스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택배업체 페덱스(FedEX)의 포장 박스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드의 작품 제작 연도가 1983년인데 포장 박스에 적힌 글씨체 등은 페덱스가 1994년 이후부터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NYT는 “1994년은 바스키아가 사망한 지 6년 후”라며 가고시안의 말을 인용해 “올랜드 미술관의 설명은 현실성 없는 시나리오”라고 비판했다.
브랜드 전문가인 린던 리더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포장 디자인과 기업의 브랜딩 역사를 뒤져봐도 위작 논란이 된 그림에 쓰인 폰트는 1994년 이전까지 쓰인 적이 없다"고 밝혔다.
NYT는 "FBI 조사의 구체적인 초점과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짜인 것을 알고도 예술품을 의도적으로 판매했을 경우 연방 범죄가 된다"고 전했다.
165년 미국 '국민 갤러리' 뇌들러 문닫은 스캔들 재연될까
FBI가 미술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는 이유는 ‘2011년의 위작 악몽’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시장의 역대급 호황 직후인 2011년 ‘뇌들러 화랑 스캔들’은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등의 명작을 속여 판 165년 역사의 갤러리가 문을 닫은 초유의 사태로 기록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존경받는 화랑의 비위는 당시 ‘미술판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불리며 미술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1994년 롱아일랜드에 사는 그라피라 로잘리스라는 딜러가 추상표현주의 대가의 작품 40점을 뇌들러에 들고 오며 시작됐다. 출처에 대한 기록 없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고객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공개됐다. 실제로는 로잘리스가 중국인 길거리 초상화가 페이 쉔 치앤을 데려다 그린 가짜 그림. 뇌들러는 2008년까지 14년에 걸쳐 팔았고, 로잘리스는 뇌들러 외에도 다른 화랑에 20여 점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구매자들의 고소로 법정에 가게 됐다.
구찌 회장도 속은 미술계 '비밀의 커넥션'
뇌들러는 2000년 로잘리스에게 67만달러에 산 잭슨 폴록을 화이트라는 컬렉터에게 310만달러에 팔기도 했다. 75만달러짜리 마크 로스코 그림은 550만달러에, 60만달러의 클리포드 스틸의 그림은 430만달러에 팔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존경받는 갤러리는 문을 닫았고, 미술계는 폐쇄적인 구조에 대한 비판과 불신이 커지며 한 동안 냉각기를 견뎌야 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제이슨 헤르난데즈 검사는 "미술시장은 묘하다. 1000만달러가 넘는 작품이 화랑이나 딜러의 명성만으로 팔린다. 작품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도 보증서도 없다"고 했다. 화랑 주인의 말 한마디에 100억원이 넘는 돈이 오고가는 시장을 비판했다. 극도의 비밀과 익명성이 기득권을 가지는 시장이라는 얘기였다.
뇌들러의 희생양 중에는 가짜 로스코 그림을 830만달러에 산 도미니코 드 소울도 있었다. 그는 경매회사 소더비와 패션기업 톰포드 회장, 갭의 이사를 맡은 하버드 법대 출신의 변호사. 1994년 구찌 그룹의 회장을 맡아 그룹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로도 유명하다. 뇌들러 재판 당시 판사가 "소더비 회장이 어떻게 그림에 대해 모를 수 있냐"고 묻자 "나는 가방은 알지만 그림은 잘 모른다"고 증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뇌들러 갤러리의 미술품 감정사이자 30년 경력의 큐레이터인 앤 프리드만은 다수의 미술품 수집가와 박물관, 거물급 셀럽들에게 위조품을 팔았지만 공모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2011년 자신의 이름을 건 갤러리를 다시 열었다.
미술시장 역대급 호황…FBI가 나서서 '예방주사' 처방
미국 정부가 바스키아 그림에 칼을 빼든 결정적 이유는 또 있다. 코로나19가 끝나며 미술시장에 돈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5월 2년 만에 재개된 뉴욕 경매 시장에선 앤디 워홀의 '총 맞은 마릴린'이 역대급 가격을 기록하고, 바스키아의 그림이 역대 2번째 기록을 경신하면서 "2022년이 미술 시장의 새 역사를 쓸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2011년 세기의 스캔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 미국 미술의 세계적 신뢰도를 굳히겠다는 목표가 더해지며 '예방주사'를 놓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술 시장 호황과 함께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온라인 미술품 거래’시장의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
바스키아,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뱅크시 등의 위작을 속여 판 혐의로 기소된 다니엘 엘리 부아지즈는 미국 최대 온라인 경매 사이트인 ‘라이브옥셔니어’ 등에서 495달러(약 61만원)에 산 바스키아 그림을 위장 수사 중인 FBI 요원에게 1200만달러(약 148억원)에 팔아 덜미를 잡혔다.
4건의 사기 혐의로 기소된 부아지즈는 최대 20년의 징역형과 최대 50만달러(6억원)의 벌금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부아지즈는 플로리다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온라인 옥션으로 싼값에 그림을 대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