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월 일본 최대 통신회사 NTT도코모가 내놓은 아이모드는 ‘스마트폰의 원조’란 평가를 받는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아이앱이라는 앱 장터에서 앱을 내려받는 생태계도 처음 선보였다. 아이모드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2006년 1월 NTT도코모는 가입자 수 4568만 명을 달성해 세계 최대 무선 인터넷 공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데는 실패했다. NTT도코모가 지나치게 독자성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이모드를 이용하기 위해선 NTT 도메인 등록이 필수였다. 앱도 모두 자체 개발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2007년 애플이 내놓은 아이폰의 사업 모델은 아이모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 세계 이용자들이 함께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오픈 플랫폼 전략을 채택했다는 게 차이였다. 정보기술(IT)업계 전문가들은 “NTT도코모의 전략이 조금만 달랐어도 애플 대신 일본이 오늘날 세계 IT산업을 주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89년 NTT도코모의 시가총액은 1639억달러(약 207조원)로 세계 1위였다. 현재는 987억달러로 절반 수준이다.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3271억달러로 NTT도코모의 23.5배에 이른다.
일본 재계는 흔히 “일본은 기술에서 이기고 사업에서 진다”고 자조한다. 기술력을 과신한 나머지 독자성을 고집하다가 세계의 흐름에서 멀어지는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
소니는 성능 면에서 월등한 제품을 선보이고도 1975년 비디오, 1992년 레코딩 규격 경쟁에서 패했다. 성능만큼 싼 가격을 중시하는 가전시장의 조류를 외면한 채 필요 이상의 고품질을 고집한 게 패인으로 꼽힌다.
기술력만 믿고 PC와 스마트폰의 시대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일본 전자회사들은 2000년대 몰락했다. 일본의 자동차산업도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FCV) 등 자체 기술을 고집하다가 전기차 전환에 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갈라파고스 재팬’이 기묘하게 진화한 사례도 있다. 일본 맥주시장이 대표적이다. 2020년 일본 맥주시장에서는 맥주맛 알코올 음료인 ‘다이산(第三·사진)’의 시장 점유율(49%)이 원조인 맥주(38%)를 처음 앞섰다.
점유율 역전 배경엔 주세가 있다. 일본은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 양에 비례해 세금을 붙인다. 다이산은 콩과 오렌지 껍질 등으로 맥주맛을 낸다. 그 결과 2020년 10월 1차 주세 개정 전까지 맥주의 주세는 77엔이었지만 다이산은 28엔이었다. 다이산의 소비자 가격이 맥주보다 90엔 쌌다.
일본 맥주회사들은 기술력을 동원해 맥주와 맛의 구분이 없는 알코올 음료를 최대한 싸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해외 경쟁사들이 프리미엄 맥주 개발에 주력하는 흐름과 반대였다. ‘주세가 일본 맥주의 갈라파고스화를 유도한다’는 지적에 결국 일본 정부는 2026년 10월까지 맥주류 주세를 54.25엔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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