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고, 너무 덥고 너무 추워 생명을 잃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해수면 상승으로 자카르타의 침수 피해가 커지자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 40도 넘는 더위가 이어진 인도 뉴델리에서는 날아가던 새들이 심각한 탈수로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진과 허리케인, 산불과 폭염 같은 재해로 몸살을 앓는 지구에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핵폭탄을 발사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지구가 멸망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의 절망을 그린 장편소설로, 영화로도 제작됐다. 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 1위,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스티븐 킹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3주간 1위를 차지하고 ‘2008년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2018년에 한국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이 제작됐었고, 지금도 인플루언서들의 서평이 끊이지 않는 책이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는 험난한 길
주요 인물은 남자와 소년, 딱 두 명이다. 두 사람의 꿈에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길에서 몇 명과 마주치는 것 외에 그야말로 두 사람이 로드(road)를 걷는 게 전부인 소설이 왜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걸까.‘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밤의 한기를 느끼자 손을 뻗어 옆에서 자는 아이를 더듬었다. 밤은 어둠 이상으로 어두웠고, 낮도 하루가 다르게 잿빛이 짙어졌다. 차가운 녹내장이 시작되어 세상을 침침하게 지워가는 것 같았다.’
소설 첫 대목처럼 우리의 삶이 답답하고 어둑하기에 빨려 들어가며 공감하는 게 아닐까. 간혹 빈집에서 지낼 때를 제외하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축축하고 비오고 눈 내리는 밖에서 불안에 떨며 잠을 청한다. 대재앙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깨끗한 물을 구하기도, 열매를 찾기도 힘들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집이나 버려진 자동차, 폐선을 뒤져 오래된 통조림이나 말라빠진 과일 같은 걸 구해 아껴가며 먹어야 한다.
아무런 희망도 살아갈 방도도 없는 두 사람의 목표는 좀 더 따뜻한 남쪽에 닿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다. 여차하는 순간 먼저 총을 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먹을 것을 도둑맞거나 빼앗기는 건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남자는 늘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아들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단단한 아빠는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며 늘 앞장선다. 길에 즐비한 시체와 황량한 땅을 보며 소년은 남자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죽나요?” 암담한 현실 속에서 남자가 생각해낸 대답이다. “언젠가는 죽지. 지금은 아니지만.”
길에서 마주친 사내가 소년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남자가 총으로 제압해 살아나지만 소년은 혼란스럽다. 남자는 소년에게 “내 일은 널 지키는 거야. 하느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라며 달랜다. 소년은 끝내 남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
끝없는 고행길에서 노인과 아이와 마주쳤을 때 소년은 남자에게 그들을 데려가자고 부탁한다. 불가능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그 대신 남자는 두 사람에게 목숨 같은 음식을 나눠준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냉정할 수밖에 없는 아빠와 암담한 상황에서도 순수를 잃지 않는 아들, 둘 다 이해가 가면서 안쓰럽다.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나는 《로드》는 독자에게 가슴이 뻥 뚫리는 순간 대신 의미있는 대화를 선물한다.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안기려는 남자에게 소년은 “아빠는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해주시잖아요”라고 툴툴거린다.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라는 남자에게 소년은 “우리가 사는 거 하고 비슷해요”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라고 재차 묻는 남자에게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반문하는 소년. 남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남자와 소년이 함께 떠난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절망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부자의 대화를 음미하며 함께 걷다 보면 갑갑한 마음이 어느 순간 따뜻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