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코네티컷주의 25세 여성 지나 마리노는 작년 한해 동안에만 직장을 2번 바꿨다. 지난해 7월 근무하고 있던 한 마케팅회사에서 좀더 규모가 큰 곳으로 직급과 임금을 높여 점핑했다. 그러나 3개월만에 또 관뒀다. 본인이 홍보를 맡은 산업군에 대해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실직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근로조건들을 구체화해 구직활동을 개시하자마자 곧바로 한 헤어케어 전문 마케팅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대해 “‘현재까지는’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4일(현지시간) “기업들이 인력 유치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미국 노동시장 열기가 뜨거워졌다”고 보도했다.
핫해진 美노동시장
2년 전엔 많은 미국인들이 실직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코로나19 감염 우려, 자산 버블, 넉넉한 실업수당 등이 원인이었다. 자발적 퇴사 건수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로 현재까지 매달 400만건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며 이른바 대퇴사(Great Resignation) 시대를 선언했다.작년 상반기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바이든 대통령은 한 대학 연설에서 완전고용을 역설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부족한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생하는 대신 기업들이 근로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싸우기를 원한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꿈은 현실이 됐다. 미 기업들은 코로나19 경기침체에서 회복한 뒤 직원들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됐다. 올해 3월 기준 미국 기업들의 구인규모는 구직규모를 560만건 이상 웃돌았다. 골드만삭스는 “구직자 1명당 1.9개의 일자리가 마련돼 있다”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노동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라고 했다. 코로나19가 미국 구인·구직시장의 지형도를 바꿔놨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프로이직러' MZ세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자발적 퇴사와 이직 간 상관관계는 거의 1대1 비율(0.91)을 보이고 있다. 즉 직장을 떠난 매달 평균 400만명 미국인들의 91%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근속연수가 짧아진 것도 미국 내 이직 시장이 얼마나 활발해졌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미국 싱크탱크 EBRI 연구에 따르면 과거 35년간 미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5년 가량이었다. 이게 지난해 이후엔 1.8년으로 급감한 것으로 추산됐다. 노동시장의 불일치 현상이 계속되면서 근로자들의 콧대는 더욱 높아졌다. 여기에 MZ세대(1995년~1980년 출생)가 노동시장의 주류로 편입한 것도 이직을 일종의 유행처럼 퍼지게 만들었다. 이 세대는 높은 임금, 워라밸 보장 등 더 나은 근로조건을 얻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직장을 관둘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딜로이트는 이달 초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밀레니얼세대의 24%, Z세대의 40%가 1년 내로 직장을 바꿀 것이라고 응답했다”고 발표했다.
미 급여정보처리업체 ADP의 넬라 리차드슨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에서 직업은 하나의 상품이 돼 버렸다”며 “만약 당신의 지금 업무가 마음에 안든다면 언제든 더 나은 일터를 골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많은 학자들이 대퇴사로 여겼던 노동시장의 흐름을 이제는 대개편(Great Reshuffling)이라고 칭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의 바라트 라마무르티 부위원장도 “미국인들의 대퇴사가 아닌 대이직(Great Upgrade)”이라고 했다.
무제한 휴가·집 제공까지
인력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은 각종 유인책을 쏟아내고 있다. 임금인상이 단연 가장 큰 유인책이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부터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 많은 기업들이 앞다퉈 직원들의 임금을 올리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코로나19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의 이직 규모는 근로자들이 기업에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협상의 지렛대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유연·재택근무제 등도 기업이 제공하는 대표 옵션 중 하나다. 코로나19 당시 재택근무를 경험해본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통근 시간을 줄여 업무 효율성이 오른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애플 직원들이 최근 사측의 주3회 출근 지시에 “다른 빅테크들은 완전한 재택근무를 보장한다”며 집단반발하고 있는 건 근로자들이 고용조건으로 근로 형태를 매우 중시한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장려하기 위한 당근책도 풍부해졌다. 무료점심 서비스, 주유쿠폰 제공, 팝가수 초빙 콘서트 개최 등 이전엔 보기 힘들었던 진귀한 풍경들도 직장에서 그려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임원급 직원들에게 ‘무제한 유연휴가제’라는 보상책을 내놨다. 언제든 원하는 만큼 쉬라는 취지다. FT는 “근로환경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월가에서 고용 유지를 위해 파격적인 실험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월트디즈니, 육가공기업 JBS 등 직원들에게 전용 주택을 분양해주기 위해 부지를 사들이는 곳까지 생겼다.
포브스는 “일손이 달리는 기업들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직원경험(Employee Experience·직원이 조직 안에서 겪는 경험)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며 “이제 HR의 화두는 직원경험”이라고 강조했다. 골드만삭스가 휴가제도를 개편하면서 “임직원들의 경험을 중시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회사의 주축이 된 MZ세대 직원들은 SNS에 익숙한 세대인 만큼 기업에서 겪은 다양한 혜택들을 온라인상으로 금세 입소문 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올해 하반기부터 전 세계가 경기침체에 빠져들면 근로자 우위 시장, 즉 활발한 이직시장도 역전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구인규모를 줄일 수 있다는 관측이다. 더타임스는 “경기침체 우려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장을 관두는 일에 더 신중해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김리안/오현우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