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을 그린 애플 TV+ 드라마 '파친코'의 원작은 2017년 출간된 동명의 소설입니다. 예일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가 2017년 출간했습니다. 파친코는 출간 이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선정됐고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에도 올랐습니다. 드라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 작가와 책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가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KACF-SF(샌프란시스코한인커뮤니티재단) 모금행사에서 '선구자상(TRAILBLAZER HONOR)'을 수상했습니다. KACF-SF는 모금행사 직후 이 작가, 이날 상을 함께 받은 데이비드 장 요리연구가 겸 셰프와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진행했습니다. 이날 나온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실패한 작가였다"
대화의 첫 주제는 '성공하기까지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이 작가는 자신에 대해 "10년 이상 실패한 작가였고 글을 쓰면서 성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 파친코 출간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출간 당시 25년 간 나를 지원한 남편이 직장을 잃었고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지만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다"며 "에이전트, 계약서 없이 파친코를 출간했다"며 "나에겐 정말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편이 실직을 하자 건강보험을 갖기 위해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찾았다고합니다. 당시 이 작가는 하드카피 한 권이 팔리면 2달러70센트, 일반적인 종이커버 책은 1달러20센트 정도를 받았습니다. 2008년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을 출간해 이름을 알렸지만 저작권 수입으로는 일반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구직활동을 하고 면접을 봤는데 당시 '어떤 빽을 써서 여기까지왔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15년 간 쓴 원고 버리고 새로 쓴 이유..."분노가 가득했다"
대화의 주제는 파친코 집필 과정으로 옮겨갔습니다. 파친코는 이 작가가 쓴 세 번째 원고였습니다. 이 작가는 19살 때 재일교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25살때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39살때 남편이 일본에 근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재일교포를 인터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생한 이야기를 듣게되면서 14년 간 써왔던 원고가 '끔찍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이 작가는 "원고는 너무 교훈적이고 분노가 가득했고 자신만의 정의가 녹아 있었다"며 "그때까지 썼던 원고를 버리고 다시 썼다"고 말했습니다.
작가 생활 중에 '멘토'가 있었는 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 작가는 "아쉽게도 젊은 작가였을 때, 중년 작가였을 때 모두 멘토가 없었다"며 "다만 공공도서관에 자주 갔었고 관대했던 사서와 선생님들의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의 유산과 문화 믿고 한국인 정체성 잃지 않아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본인의 정체성과 관련해선 "정직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직해지는 것이 서구세계, 특히 미국에서 도움이 된다"며 "한국인이 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의 유산과 문화를 믿었고 창조성에 대해 일반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 이 작가 작품엔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녹아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작가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과의 연대도 강조했습니다. 그는 SNS, 유력 일간지 기고 등을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와 이들을 겨냥한 범죄에 대해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 작가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제가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도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믿고 이를 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지난달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연이어 일어난 세 건의 아시아계 증오범죄를 거론하며 "솔직하게, 크게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명 셰프 데이비드 장, "잠도 안 자고 일하니 전 사장이 단골손님 보내줬다"
이날 미국의 유명 요리연구가인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장도 같은 상을 받았습니다. 데이비드 장은 뉴욕에서 모모푸쿠를 운영하는 셰프입니다. 한국의 백종원씨처럼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장 셰프는 성공비결로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을 꼽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프로 골프선수가 되길 원했지만 나는 공부도 못했고 골프도 싫었다"며 "유일하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요리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닥치는대로 잠도 안 자고 요리만 팠다"고 덧붙였습니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니 주변에서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장 셰프는 세계적인 유명 셰프 다니엘 볼루드의 식당에서 묵묵히 일을 했고, 이후 모모푸쿠 식당을 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다니엘이 본인의 단골손님을 점심시간에 모모푸쿠로 보낸 것입니다. 그는 "볼루드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줄도 몰랐다"며 "그 일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놨습니다.
KACF-SF는 2014년 설립된 단체로 모금 행사 등을 통해 조성된 기금을 샌프란시스코 일대 한인비영리단체 지원에 쓰고 있습니다. 성공한 1세대 한인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페리 하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날 열린 자선 모금 행사 스폰서 명단엔 실리콘밸리 유명 벤처캐피털(VC)인 알토스벤처스(대표 한 킴)와 LG그룹의 기업형벤처캐피털(CVC) LG테크놀로지벤처스(대표 김동수), 현대자동차, SK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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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