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마블의 히어로 영화들은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주인공의 복장만 같았다면 서로 다른 영화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4일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닥터 스트레인지2·사진)는 이런 점에서 기존 히어로물(物)에서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히어로물과 호러를 결합하는 식으로 참신함을 추가한 데다 시공간이 다른 수십 개의 멀티버스(다중 우주)를 무대로 삼는 등 세계관도 대폭 넓혔기 때문이다.
100만 명이 넘는 영화팬이 사전 예매 버튼을 누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계에선 닥터스트레인지2가 한산하던 극장가를 다시 북적이게 할 ‘영화산업의 히어로’가 될 걸로 내다보고 있다.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괴물에 쫓기는 10대 소녀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소녀는 73개 멀티버스를 경험하고, 그 멀티버스들로 가는 연결 통로를 열 줄 아는 아메리카 차메즈(소치틀 고메즈 분)란 인물이다. 차메즈는 이 능력 때문에 빌런(악당)들의 공격을 받는다. 스트레인지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난 차메즈는 완다(스칼렛 위치 분)와 맞서게 된다. 마블 히어로 중 한 명인 완다는 이 영화에선 빌런으로 변신한다.
시즌1에 이어 스트레인지 역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다. 드라마 ‘셜록’ 을 비롯해 영화 ‘파워 오브 도그’ ‘루이스 웨인’ 등으로 잘 알려진 그는 2016년 ‘닥터 스트레인지’로 마블 히어로물에 처음 등장했다. 이 캐릭터는 마블의 여러 히어로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물로 꼽힌다. 시즌1은 평범한 신경외과 의사이던 그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마법사로 재탄생한 뒤 악당과 싸우는 내용을 담았다.
시즌2는 이런 캐릭터의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대신 장르를 ‘히어로+호러’로 확장하고, 세계관도 넓혀 시즌1의 인기에 편승한 그저 그런 시즌2가 아니라 ‘형보다 나은 아우’가 되려 했다. ‘이블 데드’ 시리즈 등을 통해 ‘호러 장인’이란 별명을 얻은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향이 크다. 미국 영화평론가 드루 테일러는 “닥터스트레인지2는 완전히 미친 짓이다. 100%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다. 지금까지 가장 무서운 마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호러와의 결합으로 마블 히어로물에서 볼 수 없던 장면이 잇달아 나온다. 눈이 3개인 스트레인지가 등장하고, 스트레인지가 좀비가 된 멀티버스 속 스트레인지를 조종한다. 여러 멀티버스로 전환되기 때문에 히어로물보다 SF물에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철학적인 메시지도 곳곳에 깔려 있다. 컴버배치는 지난 2일 열린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현실 속 우리는 누구인가’란 복잡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는 스트레인지를 통해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수 있다.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영화는 그만큼 어둡고 복잡해졌다.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시즌1은 물론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완다비전’까지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히어로인 완다가 악당이 된 걸 쉽게 공감할 수 없다. 멀티버스가 어떻게, 왜 확장된 건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마블 히어로물 마니아를 위한 영화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2세 관람가인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