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크리스F&C KLPGA챔피언십’ 2라운드 경기가 열린 경기 포천 일동레이크CC 8번홀. 세 번째 샷을 준비하던 김효주(27)와 캐디 사이에 오간 대화는 이랬다. “어떻게 치는 게 좋을까?” “앞 핀이지만 그린 경사가 가파르잖아. 이럴 땐 조금 길게 쳐서 홀 뒤로 보낸 다음 오르막 퍼트를 노리는 게 낫지.”
이럴 땐 선수가 질문하고, 캐디가 답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날은 반대였다. 김효주의 가방을 멘 사람이 골프에 입문한 지 3년째에 불과한 그의 친언니였기 때문이다. 캐디백에서 직접 채를 꺼낸 김효주는 세 번째 샷을 홀 1m 옆에 붙여 버디를 낚았다. 그는 일정상 전담 캐디가 함께할 수 없게 되자 “추억을 쌓자”며 친언니에게 캐디를 제안했다.
언니와 함께한 1~2라운드에서 김효주는 합계 10언더파로 단독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상황은 4라운드 때 완전히 바뀌었다. 3라운드에 전문 캐디를 쓴 뒤 1일 최종 라운드에서 다시 친언니를 기용한 김효주는 7타를 잃었다. 결과는 공동 4위. 시속 20㎞가 넘는 강풍에 미스샷이 거듭되자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프로골퍼에게 캐디는 꼭 필요한 존재인가’란 오랜 의문을 김효주가 이번 대회에서 다시 불러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캐디 비용 고공행진…가성비 떨어져”
캐디는 모든 순간을 홀로 극복해야 하는 골퍼들이 골프장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동반자다. 선수와 함께 코스 전략을 짜고 클럽 선택을 조언한다. 경기 중 흔들릴 수 있는 멘털을 붙잡아주는 것도 캐디의 역할이다.하지만 전문 캐디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승한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 3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푸에르토리코 오픈에선 세계랭킹 773위 라이언 브렘(36·미국)이 가방을 든 아내와 함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지난해 7월 김해림(33)은 나 홀로 전동카트를 끌고 나와 맥콜·모나파크 오픈의 승자가 됐다.
최근 몇 년간 캐디의 몸값이 뛰면서 ‘제2의 김해림’을 꿈꾸는 선수도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디가 받는 급여는 4일 대회 기준으로 100만~150만원 정도다. 선수가 톱10, 톱5, 우승 등 좋은 성적을 내면 별도 보너스가 더해진다. 골프업계 관계자는 “캐디피 부담을 호소하는 선수가 많은 만큼 ‘노캐디’ 또는 캐디 경험이 적은 지인을 고용하는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올해부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선수들이 거리측정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노캐디 확산에 영향을 줄 것이란 분석이다.
“셰플러 매직의 원동력은 캐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떤 캐디와 함께 걷느냐’가 선수 성적과 직결된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초 마스터스대회에서 우승한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26·미국)가 그런 예다. 그의 투어 인생은 지금의 캐디 테드 스콧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무관의 강자’였던 셰플러는 지난해 11월 삼고초려 끝에 스콧을 영입했다.15년 동안 버바 왓슨의 골프백을 멘 스콧은 왓슨이 2012년과 2014년 마스터스 ‘그린재킷’을 입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셰플러호(號)’로 갈아타자 마스터스 그린재킷도 따라왔다. 셰플러는 스콧과 함께 9개 대회에 출전해 4승을 합작했고,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섰다. ‘골프 여제’ 박인비(34)도 “캐디는 단순히 골프백만 메는 게 아니라 코스 안에서 믿음을 주는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날 김효주의 ‘7오버파 참사’도 전문 캐디의 빈 자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쇼트게임 천재’로 불리는 김효주지만 이날은 그답지 않은 플레이가 이어졌다. 11번홀(파4)에서 더블보기를 한 데 이어 14번홀(파4)에선 트리플보기를 써냈다.
핀 위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경기 내내 강풍이 몰아쳐 코스 전략을 뒤흔들었다. 베테랑 캐디의 도움을 받아도 어려운 환경에서 초보 캐디는 큰 힘이 되지 못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김효주는 결국 집중력을 잃었고 눈앞까지 다가왔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놓쳤다.
포천=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