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21일 15:4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삼성중공업이 ‘앓던 이’였던 원유시추선(드릴십)을 국내 사모펀드(PEF)운용사인 큐리어스파트너스(큐리어스)에 매각해 1조400억원의 현금을 확보한다. 장기 재고였던 드릴십을 처분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자율주행선박 등 미래형 선박에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다. 큐리어스는 최근 고유가로 거래가 재개되기 시작한 드릴십에 선제 투자한 후, 적기에 매각해 수익을 거두겠다는 복안이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조선업계 내 자본시장 주도형 구조조정의 성공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평가다.
장기재고 드릴십 매각해 1兆 '현금' 확보
21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이날 오전 이사회를 열어 드릴십 4척을 사모펀드(PEF)운용사인 큐리어스파트너스에 매각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계약규모는 총 1조400억원이다. 이날 삼성중공업은 큐리어스크레테기업재무안정기관전용사모투자 합자회사(PEF)에 현금 5900억원을 출자한다고 공시했다. 선순위 투자자 출자금 1600억원, 금융기관의 차입금 3200억원을 합쳐 총 1조700억원의 자금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PEF가 이 중 1조400억원을 드릴십 4척 구입비용으로 쓰고 나머지 300억원은 PEF 운영자금으로 활용키로 했다.
드릴십은 깊은 수심의 해역에서 원유·가스 시추 작업을 할 수 있는 선박 형태의 설비다. 척당 건조 비용만 최소 5억달러(약 6100억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지만 삼성중공업엔 그동안 애물단지였다. 2014년 초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던 국제유가가 같은해 하반기부터 40달러대까지 폭락하면서 선주사들이 줄줄이 드릴십 인도를 거부했고, 만들어놓은 배들은 조선소에 묶여야 했다. 삼성중공업도 선주사들이 일방적으로 인도 계약을 해지하면서 미국 퍼시픽드릴링(PDC) 1척, 노르웨이 시드릴 2척, 그리스 오션리그 2척 등을 재고로 보유해야 했다.
수천억원을 투입해 제작한 드릴십을 제 때 인도하지 못하면서 쌓인 손해는 회사 재무제표에 대손충당금으로 반영됐다. 유지보수비로도 매년 수백억원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삼성중공업은 연결기준 지난해 1조3120억원, 2020년 1조54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는데, 미인도된 드릴십도 대규모 손실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드릴십 시장의 선행지표인 국제 유가가 최근 고공행진하면서다. 원유 시추 시장이 회복되면서 조선업계에선 드릴십 거래가 재개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다. 삼성중공업에도 에너지기업들의 매수 문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업계에선 통상적으로 유가 50달러~60달러 이상을 드릴십의 손익분기점(BEP)으로 보고 있다. 국제유가는 지난달 초 127.98달러(브랜트유 기준)로 1년 내 최고점을 기록한 후 100달러 이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선박 인도가 재개되더라도 삼성중공업의 재무제표에 반영되기까지 시차가 있다는 점이었다. 글로벌 조선사들이 자율운항 선박 등 미래 첨단선박 투자를 위한 연구개발(R&D)에 막대한 자금을 쏟는 상황에서 유동성 확보도 시급한 상황이었다. 오랜기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만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서라도 재무구조가 개선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삼성중공업 내부에서 선박들을 즉시 유동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고민한 이유다.
큐리어스-삼重 수익·위험 나누는 구조
투자업계에선 큐리어스가 향후 유가가 70달러 이상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번 거래에 적극 나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주요 에너지사들이 심해 유전 탐사개발을 재개해 친환경·7세대 고사양 드릴십 수요가 늘고 있는 만큼 이미 건조돼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삼성중공업의 드릴십에 ‘러브콜’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투자 안정성도 보강했다. 삼성중공업이 인수대금 1조원 중 4000~5000억원 가량을 후순위로 큐리어스가 만든 펀드에 재출자하는 구조가 거론된다. 삼성중공업은 향후 드릴십 매각에 따른 차익을 일부 확보할 수 있다. 올해 이후 유동성이 개선될 경우 큐리어스로부터 선박들을 되사오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
PEF에 출자할 주요 기관투자가 입장에선 선순위, 중순위 투자자로 참여하게 돼 유사시에도 투자금을 일부 보전할 수 있다. 이번 거래에 포함되기로 점쳐지는 드릴십 4척 중 1척(크레테 EGF)은 지난해 11월 유럽 선사에 2억4500만달러(약 3029억원)에 매각하기로 이미 결정돼있다. 내년 3월까지 절차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1조원의 투자금 중 최소 3000억원은 이르면 내년 초 회수할 수 있는 셈이다.
큐리어스파트너스는 기업 구조조정을 전문으로 하는 PEF운용사로 동부그룹, 이랜드리테일 등에 투자해 성과를 쌓았다. 2020년엔 파산 위기에 빠진 HSG성동조선에 1500억원을 투자해 올해 3월 회수에 성공했다. HSG성동조선은 이때 투입된 유동성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전체 670명 중 약 500여명의 무급휴직자들이 전원 복직하는 등 정상화됐다. 큐리어스도 연 내부수익률(IRR) 30%를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지난해 1500억원 규모 사모부채펀드(PDF)를 신규 조성하는 등 운용 규모도 키우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PEF 간 협업이 성공모델로 정착할 경우, 자본시장 주도의 조선업 구조조정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삼성중공업 외에 대우조선해양도 보유 중인 드릴십 4척 중 2척이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차준호 / 남정민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