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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면 내년부터 일본 상장기업들은 분기마다 실적과 사업 현황을 공시하는 의무를 벗게 된다.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임금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14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상장기업이 3개월마다 실적 등을 공시하는 의무를 폐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일본 금융상품거래법은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이 매 분기말로부터 45일 이내에 분기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분기와 3분기 보고서 공시를 없애 6개월마다 실적과 사업현황을 공개하는 반기보고서 체제로 전환한다는게 일본 정부의 계획이다. 연간 실적과 사업 내용을 상세하게 담은 유가증권보고서(한국의 사업보고서)와 매 분기 실적 수치만 간단하게 공시하는 결산단신은 유지한다.
일본 정부는 결산단신도 기업 자율에 맡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 금융청은 이르면 내년 2월 열리는 통상 국회에 법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도 7~8년 전부터 분기 보고서 공시 의무를 폐지했다.
◆'두마리 토끼' 잡을까
분기보고서 폐지는 기업의 부담 경감과 임금인상 유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책으로 분석된다.회계법인의 감사를 받아야 하는 분기보고서 작성에는 보통 1개월 이상이 걸린다. 정보를 잘못 공시하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벌칙조항도 있다. 간사이경제연합회는 이달 "분기보고서를 작성하려면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며 분기 공시의 폐지를 요구하는 긴급제안서를 발표했다.
신장위구르 소수민족 인권 침해와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지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확산으로 기업들이 관련 분야에 대응하는 인력을 추가로 배치하는 추세도 분기 공시가 부담스러운 이유다.
일본 정부도 기업 환경의 변화에 맞춰 상장사에 인권 및 남녀평등 문제와 관련한 회사의 정책과 기후변화 대응 전략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이다. 공시 범위가 넓어지는 만큼 부담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는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분기보고서 폐지는 기시다 총리의 핵심 경제정책인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기시다 총리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기업의 임금인상을 꼽고 있다.
3개월마다 실적을 공개하는 현 제도를 "기업이 단기적인 이익과 주주 배당을 우선시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라고 평가한 적도 있다. 분기보고서를 없애면 기업들이 배당에만 신경쓰는 주주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임금 인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시다 총리는 보고 있다.
◆기시다, 금융청 장관 불러 지시
지난 2월 열린 금융청의 전문가회의에서만 해도 분기보고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전문가가 다수였다. 분기보고서는 기관투자가에 비해 경영정보를 모으기 어려운 개인투자가들을 보호하는 자료라는 이유에서였다.하지만 기시다 총리가 지난달 말 나카지마 준이치 금융청 장관과 금융청 간부들을 총리 관저로 소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시다 총리는 "경영인들이 중장기적인 시점에서 기업을 경영하도록 유도해 임금 인상을 촉진해야 한다"며 공시제도 개선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기보고서를 폐지하면 경영 투명성이 낮아져 해외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본이 2008년 분기 공시를 의무화한 계기도 2006년 라이브도어가 재무정보를 거짓으로 공개해 주가를 조작한 사건이었다.
분기보고서 폐지로 상장사의 분기 실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결산단신은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지 않은 자료다. 허위공시에 대한 벌칙조항도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2014~2015년 분기 공시를 폐지했지만 상장기업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분기보고서를 공개하고 있다. 미국 투자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다. 독일도 2015년 분기 공시를 폐지했지만 프랑크푸르트증권거래소 최상위 시장의 상장사에는 거래소 규정을 통해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1970년부터 분기보고서를 의무화한 미국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폐지를 검토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