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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점들로…'꽃의 왕' 모란에 담은 내면의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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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미술가라면 민중미술이나 추상화를 그려야지. 꽃 같은 건 설령 부모님이 그려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해야 해.”

1980년대 초 어느 날, 한성대의 한 강사는 이제 막 미술공부를 시작한 김순협 작가(61)에게 이렇게 말했다. 꽃 그림을 그렸다간 화단으로부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작가’이거나 ‘통속적인 미술인’이란 평가를 받을 게 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꽃은 그의 작품에서 멀어졌다.

독일 쾰른대에서 유학할 때도 가끔 꽃으로 화폭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도교수가 내준 “동양의 특징을 담은 독창적인 작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숙제를 멋지게 완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 가는 대로 작품을 그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의 눈에 꽃이 다시 들어온 건 환갑을 맞은 지난해였다. 처음엔 장미였다.

“새삼 꽃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리니 그림을 그린다는 게 너무나도 즐겁더군요. 독창성에 사로잡혀 대중성을 잃은 광기 어린 미술이 아니라 행복과 아름다움, 즐거움을 공유하는 미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미를 원 없이 그리고 나자 화려하고 탐스러운 ‘꽃의 왕’ 모란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린 모란 작품 25점을 소개하는 초대전 ‘모란 PEONY’가 4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린다. 절정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모란이 만개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지난해 7월 서울 인사동에서 장미 그림을 전시했는데, 대부분 팔렸어요. ‘앞으로 내가 장미를 이보다 더 잘 그리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꽃에 도전하고 싶더라고요. 꽃의 왕이라고 하는 모란이었죠.”

김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화면을 수놓은 하얀 점이다. 꽃을 볼 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나 종소리, 행복감 등 공감각적 심상을 점으로 리듬감 있게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과감하면서도 독특한 색 표현과 반짝이는 그림 표면도 시선을 끈다. 캔버스에 금박이나 은박을 접착제로 붙여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다양한 색의 꽃을 그려 연출했다. 작품에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명은 모두 ‘모란’. 전시 작품 중 김 작가 스스로 “마음에 쏙 든다”고 자평하는 그림도 두 점 포함돼 있다. “이쪽에 걸린 2196번과 2189번 작품은 제가 보기에도 잘 그린 것 같아요. 뭐, 관람객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장미 전시 때도 다른 작품은 거의 다 팔렸는데 제가 좋아한 두 점은 안 팔렸네요. 전부 다 ‘내 새끼’지만, 뭐가 인기 있을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하하.”

김 작가는 쾰른대에서 6년간 유학하며 회화와 미술사를 공부했다. 1992년 귀국 후에는 한성대 목원대 김천대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강의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독일의 판화 거장 캐테 콜비츠(1867~1945),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의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다양한 화풍을 시도해 봤어요. 암울하고 파괴적인 그림, 세계화와 자본의 논리 등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갤러리도 운영해 봤지요. 그렇게 내린 결론이 ‘미술은 작가와 관객 사이의 교감’이라는 겁니다. 작가가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을 이웃과 나누는 게 미술이라는 얘기예요. 지금은 감귤나무의 일종인 하귤나무를 그리고 있는데, 열매가 달린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림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전시는 이달 2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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