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저의 몸 속 DNA에 오페라가 새겨진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오페라를 연출할 때만큼은 청년 못지않게 힘과 열정이 넘치거든요.”
한국 나이로 80세(1943년생)란 게 믿기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장(老長) 연출가는 손과 발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음달 7일 한국 무대에 올릴 오페라 ‘아틸라’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만난 이탈리아 오페라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는 ‘오페라의 스티븐 스필버그’란 명성에 걸맞게 자신감이 넘쳤다. “내 삶 자체가 오페라” “언제, 어디에서, 어떤 작품을 맡아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식이다.
이게 허풍이 아니란 건 델 모나코가 걸어온 길을 짚어보면 알 수 있다. 22세였던 1965년 ‘삼손과 데릴라’로 데뷔한 그는 ‘57년차 오페라 연출가’다. 그가 만든 오페라만 120편이 넘는다. 이 중 다섯 편은 세계 최고 오페라단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과 손잡고 제작한 작품이다. ‘콧대 높은’ 뉴욕 메트로오페라단이 한 사람과 이렇게 많이 협업한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델 모나코는 2015년 프랑스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전설적인 테너로 추앙받고 있는 그의 아버지(마리오 델 모나코)에 버금가는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이유다.
그런 그가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다음달 7일부터 나흘 동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아틸라’를 국내 초연한다. 아틸라는 오페라의 거인 베르디의 아홉 번째 작품이다. 로마 사극의 엄숙미와 전쟁의 참상을 담은 대작이다. 184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을 국립오페라단이 176년 만에 국내에 들여온 것이다.
초연인 만큼 출연진을 화려하게 채웠다.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이 총출동한다. 주인공 아틸라 역은 베이스 전승현과 박준혁이 나눠 맡고, 소프라노 임세경·이윤정이 오다벨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오페라 스페셜리스트인 지휘자 발레리오 갈리가 지휘석에 올라간다.
델 모나코는 이 모든 걸 총지휘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번 공연은 모험이었다. 그가 아틸라를 연출하는 건 1972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 이후 50년 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델 모나코는 국립오페라단의 제안을 단번에 수락했다고 했다.
“다른 연출가에게 제안했다면 꽤나 고민했을 겁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자기 실력을 의심했겠죠. 120여 편을 제작한 저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안을 듣는 순간 밑그림이 그려졌거든요.”
델 모나코는 뜨거운 가슴에 차가운 머리를 갖춘 연출가로 통한다. 자신이 맡은 오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제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악보, 악기를 섭렵한다. 그렇게 연구해야 영감이 떠오른다고 했다.
“오페라 한 편을 제작할 때마다 작곡가의 편지, 일기를 찾아보며 모든 요소를 연구합니다. 피아노를 비롯해 트롬본 등 관악기를 익히고 연주할 악보도 모두 외우죠. 기본기가 탄탄해야 순간순간 스쳐가는 영감을 실제 무대에 구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안주하지도 않았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연에 도입했다. 그는 오페라 ‘아이다’의 무대 배경을 주식시장으로 바꿔 연출했고, 2004년 처음 한국을 찾아와 오페라 ‘카르멘’을 선보일 때는 길이 100m짜리 무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대형 프로젝터를 활용해 동적인 무대를 구성했다. 그는 의상과 무대 사진을 하나씩 짚으며 콘셉트를 설명했다. 델 모나코는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장치는 최대한 정적으로 보이게끔 했다”며 “현실감 넘치는 의상과 배경에 투사한 영상을 활용해 강렬한 이미지를 선보이려는 의도였다”고 했다.
18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독일 본극장 극장장을 지낼 때 베이스 강병운과 오페라를 제작하며 한국인 성악가들의 실력에 놀랐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페라 실력이 뛰어난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델 모나코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성악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위세에 성악가들이 기죽지 않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성악가들이 실수하면 혼내는 대신 자신에게 한라봉 등 한국 과일을 선물하라는 식이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음악으로 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음악 자체가 대사인걸요. 60년 가까이 오페라를 제작하며 고수한 저의 철학입니다. 관객들도 음악을 따라가면 아틸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