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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갑영 "교육의 핵심은 다양성 존중…'자율형 사립大'부터 도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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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현 명예특임교수)은 교육계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많은 대학이 학생 인구 감소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2012년 연세대 총장에 취임해 끊임없는 혁신으로 학교를 ‘글로벌 명문’으로 도약시켰기 때문이다. 선진국 명문 사립대를 벤치마킹해 그가 인천 송도에 도입한 RC(residential college·거주형 대학) 교육은 서울대 등 다른 국내 대학들의 부러움을 샀다. 국내 최초의 정보기술(IT) 전문 대학원 설립, 연세대의 글로벌화를 이끈 언더우드 국제대학 설립 등도 교육계를 선도한 혁신 사례로 꼽힌다.

정 전 총장은 지난 9일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한국경제신문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연락해 왔다. 21일 서울 적선동 한국생산성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교육이 우리 사회 정책 아젠다 중 후순위로 내몰린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부터 토로했다.

정 전 총장은 “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워낙 첨예하다 보니 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문제, 수도권 쏠림 등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다 보면 결국 교육과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 전 총장은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교육의 기능이 갈수록 약화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부작용이 여실히 드러난 평준화 일변도의 교육정책을 중단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배려는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학력평가 부활, 자율형사립고 폐지 중단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교육에 자율성을 부여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하향평준화로 흘러갔습니다. 명확한 교육철학을 갖고 초기부터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교육이 정치 이념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떨어진 공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당장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에 빠진 대학들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육계에선 윤 당선인이 선거 과정에서 뚜렷한 교육철학을 보여주지 않은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에서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합쳐 과학기술교육부를 신설할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면서 이런 우려는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교육부를 없애느냐 합치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도 규제가 아니라 지원 위주로 정책을 바꿔야 합니다. 성공적인 선진교육 시스템을 찾기 위해 교육계에선 주로 미국 영국 싱가포르 등을 벤치마킹합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교육부의 성격이 교육 지원 부서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규제보다 지원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지원을 5년 단위로 해줍니다. 한국처럼 처음부터 특정한 조건을 걸기보다 5년 뒤 평가해서 성과를 보고 다음 5년간 지원 여부를 결정합니다.”

▷한국 교육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교육의 본질적 목표는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이 특징·장점·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학생들의 잠재적 능력을 끌어내는 것,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학문적 수월성을 끌어올리는 것, 사회적 신분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우리 사회에서 모두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이념화하면서 정치 논리에 휩쓸렸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지금처럼 무너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그동안 정부는 평준화에 매달려왔습니다. 획일적인 잣대로 규제하고 다양성을 훼손하면서 공교육의 하향평준화가 꾸준히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사교육을 찾게 되고, 저소득층과 격차는 되레 커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사관고등학교 등 자사고 폐지입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자는 취지는 좋았지만, 획일적인 평준화로 모든 사람이 질 낮은 교육을 받게 됐고 사교육 증가로 사회적 격차는 더 커졌죠. 그 결과 꾸준한 평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명문대 입학생 중 고소득층 자녀가 차지하는 비율은 과거보다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평준화의 역설입니다.”

▷대학들이 규제에 둘러싸여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등록금이 사실상 14년째 동결되면서 대학들은 고사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사립대 1년 등록금이 800만원이 채 안 되는 곳이 많은데, 서울 강남의 유치원 등록금보다 낮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재원이 부족한데 어떻게 질 높은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최근 정부 지침에 따라 대학들이 모두 인공지능(AI) 대학원 신설에 나섰는데 재정이 부족하다 보니 대다수 대학이 교수들의 연봉을 맞춰주지 못해 기존 컴퓨터공학과 교수들로 채워 넣는 실정입니다. 미래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죠.”

▷한국이 벤치마킹할 만한 선진국의 대학 교육정책이 있을까요.

“현재 글로벌 대학평가 100위 안에 드는 국내 대학은 1~2개뿐입니다.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싱가포르는 세계 50대 대학에 드는 대학을 3개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학 교육에 자율성을 부여하다 보니 높은 연봉을 주고 유능한 교수들을 데려옵니다. 노벨상을 받은 교수들까지 초청해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인재가 모여들고 대학 경쟁력이 올라가는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은 1960~1980년대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이 원하는 연구개발(R&D) 역량을 좇지 못 하는 현재 대학 의 수준으로는 과거와 같은 국가 성장 속도를 유지하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대학들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할까요.

“대학들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내에서 등록금 인상을 허용해줘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기여입학제 등을 도입할 수 없다면 시범적으로 ‘자율형 사립대학’을 도입해 보는 것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등록금 산정, 입시 등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소득 하위 15~20%의 소외계층에서 의무적으로 학생을 받으라는 조건을 내걸면 많은 대학이 반길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대, 예일대 등 명문대들도 상당수의 소외계층 학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교육의 질은 높이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지방 대학들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할 것이란 얘기도 나옵니다.

“지방 대학 몰락의 근본 원인은 고교평준화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각 지방에 명문고들이 존재해서 지방거점대학들도 좋은 인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역 유지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강남에 집을 마련합니다. 수도권 집중화만 더욱 강화하는 풍선효과를 불러온 것이지요. 지금 교육부는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서울을 포함한 전국 모든 대학의 정원을 30% 줄이자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수도권 선호도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대로 가면 서울과 지방의 격차만 더 키울 것입니다. 지역 국립대들을 중심으로 대학을 통폐합하고 정부 지원을 집중해 특성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백화점 식으로 모든 학과를 개설하기보다 선진국처럼 지역 산업에 맞는 특정 학과에 집중하는 대학이 늘어나야 합니다. 교육 여건만 좋아지면 젊은이들도 지방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주도도 해외 유수의 학교가 들어오니 학생들이 모여들지 않았습니까.”

▷인구 감소 시대에 초·중·고교 교육 형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초·중·고교 학생들은 습자지처럼 빨아들이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다양화한 교육을 하기 좋습니다. 지금은 획일화된 입시에 집중하다 보니 다양성이 훼손돼 있습니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교육 형태를 다양화할 수 있는 훌륭한 여건이 됩니다. 교사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초등교사들이 20대 중반에 교단에 서면 60대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그 기간에 학문과 교육 환경은 엄청나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교원 재교육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어요. 고교학점제는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서울과 지방의 교육 격차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있습니다. 대책을 함께 고민하며 추진해야 합니다.”

▷고등교육과 초·중등교육 이외에 또 다른 분야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얘기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평생교육입니다. 사회가 갈수록 고령화하면서 재교육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지요. 사회 공동체로서 이런 부분을 보완해줄 교육 프로그램을 계속 내놔야 합니다. 지금은 백화점 문화센터가 이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데, 대학들이 한번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1951년 전북 김제 출생
△1975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8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 석사
△1985년 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
△1986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2006년 연세대 원주캠퍼스 부총장
△2011년 제30회 다산경제학상 수상
△2012년 연세대 제17대 총장
△2013년 대통령 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금융분과 위원장
△2014년 감사원 감사혁신위원장
△2016년 한국생산성본부 고문
△2016년 사단법인 프롬 대표
△2020년 대한항공 이사회 의장
△2021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정리=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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