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정성스럽게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남편(다나베 세이치 분)은 직장에서 못 마친 업무에 정신이 팔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리카는 포장된 선물도 조용히 내놓는다. 남편은 “이게 뭐야?”라며 포장지를 뜯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어색한 미소에도 고마운 리카는 “일할 때 시계 필요할 거 같아서”라고 말한다. 적은 월급에도 차곡차곡 돈을 모아 준비한 선물이다. 하지만 이내 남편은 “운동할 때 하면 되겠네”라고 무심히 답한다. 리카는 “비싼 거 아니어서 미안해”라며 돌아서 고개를 떨군다.
버블 붕괴로 맞이한 ‘잃어버린 20년’
영화 ‘종이달’의 배경은 1990년대 중반 일본이다. 리카는 정기예금 상품을 방문판매하는 계약직 은행원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리카는 우량 고객 고조(이시바시 렌지 분)의 집을 찾았다. 고조는 집 금고에 현금을 쌓아두고 사는 노인이다. 리카의 방문에 고조는 ‘갑’의 지위를 한껏 즐긴다. 리카는 차를 타 오고, 고조는 리카에게 성희롱 섞인 농담을 던진다. 고조는 부엌에 있던 리카의 어깨를 만지려고까지 한다. 그 순간 젊은 남자가 불쑥 집에 들어온다. 고조의 손자 고타(이케마쓰 소스케 분)다. “괜찮나요?”라며 놀란 리카를 달랜다. 고조는 호통친다. “누구 멋대로 들어와!” 고조는 고타에게 “버러지같이 내 돈만 노리는 놈”이라고 또 한번 소리친다. 대학생인 고타는 등록금을 빌리고자 매번 고조의 집을 찾았다. 고타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쫓겨났고, 아르바이트도 찾기 쉽지 않아 등록금을 댈 방법이 없었다. 고조는 부자임에도 고타를 도와주지 않는다. 고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조의 집에 매번 방문하지만 둘 사이는 계속 틀어지고 만다.당시 일본 사회에선 고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1990년 일본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급속하게 하락하는 버블 붕괴 국면을 맞이한다. 이후 일본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지고,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젊은 층들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보통 국가 경제는 자산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진 이후 불황에 빠진다. 이는 ‘역(逆) 부의 효과’ 때문이다. 자산 가격이 급속도로 하락하면 경제 주체들은 소비를 줄이게 된다. 자산을 취득하려고 끌어온 부채를 갚기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어서다.
자산 가격 하락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자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금융회사는 부채 상환을 요구하고 채무자들은 너도나도 자산을 매각하게 된다. 하락이 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1990년 시작한 일본의 자산 가격 하락은 2005년까지 지속됐다. 2002년엔 1990년 대비 자산 가치 하락 규모가 1500조엔(약 1경5645조7500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으로도 불린다.
가짜 위에 쌓는 쾌락
리카는 고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리카는 고타를 연민하게 된다. 리카 또한 일본 경제에 그늘이 드리운 상황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겨우 계약직을 따낸 여성이다.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자신의 삶을 억누르며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 날 리카는 지하철역에서 고타를 우연히 만난다. 둘은 홀린 듯 강한 끌림을 느끼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리카는 죄책감보다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에 도취된다.그러다 리카는 끝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다. 고타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조의 예금에서 돈을 몰래 빼오며 횡령을 저지른다. 처음에는 “고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어려운 법. 즐거워하는 고타의 모습에 리카는 점점 더 대담해져 간다. 고조의 돈뿐만 아니라, 다른 고객들의 예금에도 손을 댄다. 빼돌린 돈으로 그들은 초호화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명품 가방과 옷을 거침없이 사며 행복해한다. 가짜로 이뤄진 허영 속에서 당장의 순간만을 살며 쾌락을 느낀다.
구민기 한국경제신문 기자
NIE포인트
1. 1990년대 일본 경제에서 버블이 붕괴된 원인에 대해 찾아보자.2. 버블이 붕괴되면 경제적 악순환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학습해보자.
3. ‘역(逆) 부의 효과’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