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스럽다’의 대상이 된다는 건 공포다. 비아냥, 비판, 비난을 한꺼번에 내포한 그 명명(命名) 하나로 피사체는 한 순간에 낡고, 새롭지 않으며, 심지어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낙인 찍힌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마찬가지다. 그동안 쌓아 온 경험, 능력, 공헌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양 묻혀버린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영패션을 맡고 있는 백화점 팀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충격적이다. 그는 “시장 조사 차원에서 백화점 주요 고객들의 소비 성향을 탐문했다”며 “MZ세대들이 백화점 쇼핑을 꼰대스러운 행위로 취급한다는 얘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X세대와 함께 늙어간 백화점
한때 백화점은 최신 유행의 상징이었다.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내 유명 백화점은 늘 젊은 소비자들로 북적였다. 누군가에게 귀한 선물을 하려면 당연히 백화점부터 찾았다. 올 봄에 유행할 패션이 무엇일 지를 알아내려는 ‘패셔니스타’들도 백화점 매대 입구에 서 있는 마네킹의 패션을 눈여겨 보곤 했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1%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백화점은 1990년대에 등장한 X세대의 취향을 사로잡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대중 문화의 르네상스를 만들어냈던 X세대는 패션과 액세서리에서도 과거의 틀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브랜드를 선호했고, 덕분에 영패션(young fashion)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빈폴, 헤지스라는 대형 트래디셔널 캐주얼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제일모직과 LG패션은 폴로, 타미힐피거에 못지 않은 ‘내셔널 브랜드(국내 기업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전국 단위로 팔리는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X세대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었다. 롯데의 영플라자, 현대백화점의 유플렉스 등 영패션 전용관이 전국에 줄줄이 들어섰다. 패션 기업들이 잇따라 증권 시장에 상장한 것도 이 시기다.
X세대와 함께 누렸던 백화점의 영화는 2010년대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힙합퍼를 필두로 1020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온라인 유통 채널이 등장했다. ‘무진장 신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무신사가 패션 플랫폼으로 등장한 것도 2012년이다. 이들은 소위 스트리트 패션이라 불리는 1020세대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을 모바일에 모아놨다. 저렴하면서도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새로운 유통 채널을 만나 날개돋친 듯 팔렸다. 어쩌면 이 때가 백화점이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시점이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무신사는 ‘을 중의 을’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은 ‘8대2의 법칙’에 집착했다. 전체 매출의 8할을 잘 팔리는 2할이 벌어준다는 얘기다. 삼성물산, LF, 한섬, 신세계인터내셔날 등 패션 대기업들과 공생하면서 백화점은 연 매출 1000억원 이상씩 잘 팔리는 브랜드에 집착했다. 새로운 물결은 잘 팔리는 20%가 아니라 나머지 80%가 잉태하고 있었지만, 백화점과 패션 대기업들은 이를 애써 무시했다. 시쳇말로 백화점은 X세대와 함께 늙어갔다.
해외 브랜드 진열장으로 변한 일본 백화점 전철 밟을라
코로나19와 함께 보낸 최근의 2년은 백화점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줬다. 이대로 가다간 적자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백화점들은 소위 명품 등 해외 브랜드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패션 대기업들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당장 돈이 되기 어려운 데다 거액의 투자비를 잡아 먹는 내셔널 브랜드를 키우는 대신, 해외 브랜드 판권을 가져오는 것으로 키를 완전히 돌렸다. 사실, 패션 대기업들은 종합상사의 패션 부문에서 분할된 조직이다. 애초의 DNA가 똘똘한 해외 물건을 잘 골라내 국내에서 파는데 특화돼 있다는 얘기다. 해외 브랜드 유치에 가장 공을 들인 곳은 신세계다. 덕분에 신세계는 지난해 매출(11월까지 누계)이 1조506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05% 증가했다. 해외의 유명 브랜드들을 한데 모아 놓은 신세계 강남점은 연간 거래액이 2조원을 넘는 국내 유일의 백화점에 등극했다. 갤러리아 압구정점도 지난해 처음으로 거래액 1조원을 넘었다.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봐야할 게 있다. 값비싼 해외 브랜드로 도배한 백화점을 MZ세대들은 ‘꼰대스럽지 않다’고 생각할까. X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화양연화를 누렸던 백화점이 요즘 세대의 취향을 꿰뚫고 있는 것일까. 과거 일본이 그랬듯이 조만간 한국에서도 ‘명품 쇼핑=꼰대’라는 공식이 성립될 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 2010년 3월 일본 도쿄 빅사이트 국제전시장에서 제20회 유통교류포럼이 열렸다. 좌석을 꽉 채운 500여명의 참석자들은 당시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이 강연을 시작하자 동시통역기를 매만지며 귀를 기울였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한국 백화점이 성장을 거듭하는 비결을 듣고 싶다”는 일본소매업협회의 제안을 이 사장이 흔쾌히 수락해 이뤄진 자리였다. 일본 유통포럼에 한국인이 연사로 초청된 것은 처음인 터라 한국경제신문을 비롯해 많은 언론이 주목했다. 강연 후 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롯데백화점 창립 후 30년간 일본에서 배우기만 했는데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서 성공사례를 발표하게 돼 감개무량합니다”
아마 이 때는 롯데 등 한국의 백화점들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눈과 귀를 가리고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