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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로 새긴 코끼리·고릴라…'공존'을 되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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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움직임을 묘사한 현대음악, 코끼리 가족이 물가에서 소통하기 위해 내는 소리를 녹음한 음향이 전시장에 흐른다. 전시장 바닥엔 짚으로 엮은 코끼리 신발이 놓여 있는데, 절구통만 한 할머니 코끼리의 신발도, 농구선수 세 명의 발도 너끈히 들어갈 아기 코끼리 신발도 앙증맞게 보인다. 타자화해 바라보기만 했던 동물들과 그렇게 정을 느끼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교감을 되찾는다.

19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막한 홍영인 개인전 ‘We Where(위 웨어)’는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공동체의 복원, 자연과의 공존에 초점을 맞춘 전시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활동 중인 홍 작가는 국립현대미술이 ‘올해의 작가상 2019’로 선정했던 실력파다. 그는 추상적 조형에 청각적 구체화를 덧입히는 작업을 해왔다. 자수를 접목한 조형예술에 음악가들과의 공동작업을 더하는 식이다.


이번 전시에는 대규모 자수를 포함한 신작 8점과 2017년 제작한 2개의 ‘사진-악보’ 연작을 포함해 총 26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회를 관통하는 화두는 잃어버린 목소리와 소통의 복원이다.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맞이하는 세로 322㎝, 가로 297㎝의 대형 태피스트리 ‘두 세계 사이의 하나의 문’은 동물원에서 관람의 대상으로 전락한 고릴라들의 말 없는 절규를 전한다.

작가가 ‘천상의 공간’이라고 명명한 태피스트리에 부착된, 자수로 짠 고릴라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고 있다. 공허한 눈빛에서 처연함이 묻어난다. 상업용 작품과 달리 남은 실을 뒷정리하지 않은 채 늘어놨다. 때론 고릴라들의 실제 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댕의 ‘지옥의 문’이 연상되기도 하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대성당 천장화가 떠오르기도 하는 태피스트리 공간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태피스트리 앞에는 고릴라가 붉은색 꽃을 들고 있는 ‘이슈마엘: 고릴라조차 꽃이 필요해’가 놓였다. 조용하지만 강한 자연의 항의를 전하는 듯하다. 홍 작가는 “인간은 국가, 남녀, 민족, 동물 등 타자와 경계를 긋는 배타주의가 강하다”며 “인간의 역사, 인간 중심의 현대사회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동물원 속 고릴라에 투영했고, 소외된 여공을 상징하는 자수를 통해 이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거대 역사라는 큰 줄기 안에 묻혔던 소수자의 목소리와 영역에 관심을 두고 퍼포먼스로 풀어내는 작업도 여럿 선보였다. 별관에 전시된 2개의 사진-악보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파업과 시위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진들에서 선과 점, 각종 도형을 추출한 뒤 이를 추상화해 자수 작업으로 옮겼다. 패널 위에 한 땀 한 땀 자수로 뜬 형상은 가상의 악보로 전환된다. 도형의 높낮이와 좌우 폭이 음의 높낮이와 연주 길이를 지시한 악보가 된다. 이 도형을 보고 음악가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한 음악이 어우러져 공감각적 예술로 거듭난다.

다섯 개의 자수 패널이 도입부, 전개부, 재현부, 카덴차 등 음악 형식에 빗대 전시된 ‘하늘에서 내려다보다’를 비롯한 16점을 함께 선보인 ‘기도자들(Prayers)’ 시리즈는 그래픽 스코어(그림 악보)로 기능한다. 각종 직물과 금속으로 구성된 ‘컬러풀 랜드(Colourful Land)’처럼 추상화한 악보는 다시 입체 공간의 조형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주영 한국문화원 전시 때 현지 음악가들과 함께했던 음악 해석이 작품에 청각적 입체감을 부여한다.

홍 작가는 “내가 나고 자란 1970~1980년대 한국의 모습과 역사를 미술 작업을 통해 다시 쓰고 싶었다”며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수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묻혔던 과거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달 26일까지.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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