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7일, 경기 포천힐스CC에서 열린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최종 라운드. 우승컵을 놓고 톱랭커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박현경, 장하나, 이정민 등 9명이 9언더파로 선두 다툼을 벌이는 사이 조용히 리더보드 최상단에 올라간 선수가 있었다. 10언더파로 경기를 마무리한 임진희(24)였다. 무명 선수라 방송 중계 카메라도 따라붙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선두로 치고 올라갔고 1타 차를 끝까지 지켜내 생애 첫 우승컵을 안았다. 골프팬 사이에서는 “이게 바로 골프다!”라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반 년 만에 ‘BC카드·한경 퀸’ 임진희를 다시 만났다. 예상치 못한 우승에 얼떨떨해하며 당황하던 무명 선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플레이에 강한 확신을 가진 당찬 프로였다. “집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챔피언 트로피를 뒀어요. 매일 보는데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고 동기부여가 돼요.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은 제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입니다.”
임진희는 ‘2021년 한국 골프의 발견’으로 꼽힌다. 지옥의 시드전을 거쳐 1년 만에 정규 투어에 복귀한 그는 상반기 내내 커트 탈락을 거듭할 정도로 부진했다. 하지만 깜짝 우승 이후 상승세를 타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강자로 자리잡았다. 하반기 5개 대회에서 톱10에 들었고 총 3억1253만원의 상금을 쌓아 상금 순위 22위로 뛰어올랐다.
사실 임진희는 2021년을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게 시작했다. 개막전도 14위로 준수하게 출발했다. 그런데 두 번째 대회부터 시작된 오른쪽 손목 통증이 좀처럼 낫지 않고 내내 속을 썩였다. ‘이렇게 끝나나’ 하고 포기하려던 마음이 커져갈 때,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을 앞두고 손목 통증이 잦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원 없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나선 대회에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우승하고 나니까 손목도 싹 나았어요. 하늘이 우승을 주시려고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승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제주 소녀’ 임진희의 고향인 중문에는 우승 직후 40여 개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강성훈, 임성재 등 서귀포 출신 골퍼는 많지만 중문 출신으로는 임진희가 1호 골퍼이기 때문이다.
플레이도 한층 과감해졌다. 10월 하이트진로챔피언십 1라운드에서는 홀인원도 했다. “예전에는 제 플레이에 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우승 뒤에는 ‘그래, 내가 맞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더 과감하게 플레이하고 있어요. 하반기 성적을 보면 그게 맞는 길 같아요.”
임진희는 지난 시즌에 80점을 주고 싶다고 했다. “우승도 하고 하반기에 톱10을 많이 해서 만족스러운 한 해였다”면서도 “시즌 초반 너무 낙담했던 것에서 10점, 하반기에 욕심에 앞서 더블 보기를 하는 등 비이성적 판단을 했던 순간에서 10점을 빼겠다”고 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그는 몸을 키우며 단련하고 있다. “지난 시즌 드라이버 비거리가 평균 237.3야드로 짧은 편은 아니지만 더 늘리고 싶어요. 미국 팜스프링스에서 할 전지훈련에서는 페어웨이 안착률을 높이고 아이언샷을 더 정교하게 끌어올리는 데 집중할 계획입니다.”
임진희의 목표는 ‘4승’이다. 그는 “당장 2022년이 아니더라도 2021년 하반기처럼 꾸준히 안정적인 플레이를 하고 싶다”며 “길게 보고 4승까지 도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진출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임진희는 “136위인 세계 랭킹을 75위 안으로 끌어올려 퀄리파잉(Q) 시리즈 자격을 따는 것이 목표”라며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힘줘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