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잡앤조이=박재현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 인류의 시간을 100년 주기의 세기로 구분할 때 각 세기별 지배가치를 담아내는 키워드가 있다. 이를테면 16세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대변되는 예술(Art)의 시대, 17세기는 정치(Politics)의 시대, 18세기부터 20세기는 각각 공업(Engineering), 경제(Economics), 경영(Management)의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디자인(Design)의 시대이다.
1919년 태동해 철저한 기능주의 교육철학의 상징이 된 바우하우스(Bauhaus), 그리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개념으로 ‘형태는 전례를 따른다’는 고전적 개념을 뒤집었던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H. Sullivan, 1856~1924)의 영향을 받으며, 모던디자인은 21세기를 디자인의 시대라 예고했다.
현대디자인의 형태는 기능(Function)의 추종을 표방해왔다. 기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장식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되고, 효용에 기반을 둔 구조나 기능적 역할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는 디자인이 등장했다. 공기저항이 적은 비행기와 자동차, 한정된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거할 수 있는 아파트, 대량생산이 용이한 콜라병과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1949~ )의 외계 생물체 같은 레몬즙 짜개, 자전거용 스틸튜브를 소재로 활용해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의 바실리 의자 등 급변하던 산업화 과정과 경제적 이슈들을 통해 각각의 기능에 형태를 부여하며 구체화 되었다.
디자인의 궁극적인 역할은 형태 부여를 넘어 기능과 그 이상에 대해 직접 결정하는 역할을 필요로 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르고, 기능은 디자이너의 의도(purpose)를 따른다. 형태 위에 기능, 기능 위에 디자이너의 의도, 즉 포지셔닝(positioning)을 하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관한 범위 설정을 위해서는 형태와 형식, 장르를 넘어서서 지금껏 알고 있는 디자인의 영역보다 넓은, 혹은 다른 범주의 일도 해냄으로서 형식 및 형태 지향적 개념에서 벗어나 의도 지향적으로 산업디자인, 인터랙션, 서비스디자인, 그래픽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purpose)과 해결방안(form)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포괄하는 가상융합기술(eXtended Reality)과 메타버스(Metaverse) 등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서 매우 크고 놀라운 미래(Surprising Future)의 가치가 폭발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제품의 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decoration) 수준을 탈피해서 디지털 기반의 디자인과 융합한 기술로 인해 바뀌는 미래의 디자인은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 미묘한 소구(needs & wants)를 찾아내면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아닌 ‘어떤 제품,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한발 앞선 상상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정보유통질서를 확보한 후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단순한 기술뿐 아니라, 디지털, 인공지능, 바이오, 오프라인 기술들이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새롭고 다양하게 융합되고 있으며, 사회, 경제, 문화, 산업 전반에서 드러나는 디지털 대전환은 스타트업의 여러 양상에서도 이미 가속화되고 있다.
스마트 스타트업은 제품 기획, 디자인, 제조, 유통 등 전 주기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고, 정보기술과 네트워크 기반 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소비자에게까지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코로나19 팬데믹과 디지털 전환의 위기는 오히려 14세기 흑사병에 뒤이은 르네상스와 같이 ‘디지털 르네상스’의 도래를 앞당기는 절호의 기회이다.
최근 스타트업 중에서 빠르게 성장한 고성장 기업 혹은 아이디어를 혁신으로 이어주는 기업의 성장과정을 가리켜 ‘스케일 업(scale-up)’이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는 씨앗이 만들어지는 단계와 완전히 개화한 단계 사이의 중간단계 정도로 보고 있다.
유망 스타트업의 스케일 업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보내고, 다시 새로운 버전의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다가 처음과 다른 분야로 진출하면서 사업규모도 커지는 과정을 거친다.
스케일 업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자금, 사람, 기술과 시장인데, 여기서 시장은 산출요소이고 나머지는 투입요소에 해당한다. 투입요소의 충분조건을 갖춰서 좋은 기술과 제품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시장에 알려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스타트업의 스케일 업에 강한 양상을 보이는 선진국 등에서는 스케일 업 과정에 필요한 네 가지 요소를 거의 대부분 민간 중심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다르다.
자금에 대해서는 벤처캐피탈, 투자 액셀러레이터 등 관심이 많아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인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을 빌드 업이 되어있지 않고, 이종 기술간 협력에도 문제가 많다. 혁신기술과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시장이 취약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구글(Google)이 처음 검색서비스 사업을 시작할 때, 이미 여러 검색서비스가 존재하는 시장에서 페이지 링크라는 알고리즘 하나로 시작해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이메일 시장으로 진입하면서 사업규모가 커졌고, 동영상과 클라우드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더 커졌다. 실패의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시장영역을 조금씩 옮겨 다니면서 먹거리를 하나씩 마련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진행해나갔던 ‘스케일 업’의 과정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시대라는 지금의 환경은 스타트업과 스케일 업이 고용과 연계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부와 각 지자체는 스타트업 지원을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스타트업의 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궁극적 정책목표인 고용창출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원인이 스케일 업이 수반되지 못하는 스타트업에 있음을 인식하던 중 스케일 업 지원정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결정적인 힘을 가한 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는 현 상황이었다.
스타트업의 스케일 업이 쉽지 않은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전국가적으로 확산되었고, 스케일 업 정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당국의 고민이 더욱 커지고 있다. 스케일 업 정책의 고민은 스타트업뿐 만 아니라, 기존 주력산업분야에서 활동하는 중소벤처기업들이 원만한 스케일 업을 이룰 수 있는 생태계 구축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내수보다 시장규모가 큰 글로벌 시장을 기반으로 스케일 업을 이룰 수 있는 스마트 스타트업과 중소벤처기업의 육성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from Start-up to Scale-up’같은 규모적인 측면과 ‘from Education to Learning’ 같은 재교육이나 직업전환 등 인적 역량 측면의 양면적 접근이 필요하다. 규모만 커지는 스케일 업이 아닌 다양한 기술개발과정과 사업화 경험을 축적하면서 기업과 기업구성원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스케일 업이 절실하다.
5년 전,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세계적 전도사이자, 베스트셀러인 ‘하버드 창업가 바이블’의 저자인 다니엘 아이젠버그(Daniel Isenberg) 박사가 한국을 찾았다. 다니엘 아이젠버그 박사가 창업과 성장을 언급하며, 건넨 비유가 인상적이다.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창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정은 아이를 잘 키우도록 하는 성장이다"라고 강조했다. 창업(Start-Up)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장(Scale-Up)이다.
박재현 씨는 디자인학 박사이자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으로 2014년부터 디지털 기반의 다양한 국책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해왔다. 특히 스마트 스타트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한 약 300억원의 정부예산을 확보, 디자인 주도 스타트업 양성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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