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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상권 잡고 후삼국 통일전쟁 승리한 왕건, 끝까지 저항한 적 품은 포용의 리더십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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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집단과 국가는 항상 생성과 붕괴, 분열과 통일의 변증법을 반복한다. 우리는 과거 민족국가라는 의식이 강했고, 항상 통일을 지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여 년 만에 재발한 후삼국이라는 분열 상태를 해소하고 통일이라는 위업을 실현한 인물은 왕건이다. 무려 40여 년 가까이 벌어진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어떻게 역사에 등장했을까.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국제 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나라처럼 민족 통일 과정에 외세로서 간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상황이었고, 북쪽은 발해와 거란이 운명을 걸고 충돌 중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는 이
러한 국제 환경을 통일의 승자가 되는 데 활용했다.
포용력과 협력을 아는 왕건의 성격
왕건은 군사 지도자로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포용성 강한 성품과 거시적인 세계관도 갖췄다. 신흥 고려는 국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고, 왕건의 정치력과 군사력도 호족세력이나 부하들을 압도할 수준에는 못 미쳤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했고, 권력 독점과 오만이 아니라 권력 공유와 인품으로 통일을 추진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궁예의 부하로 입문한 직후부터 연전연승을 거둔 그가 이미 광기를 보인 궁예의 관심술과 칼날을 벗어났다는 점은 매우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임을 알려준다. 더구나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추대로 고려를 세운 사실은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927년에 견훤은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잔악한 짓을 했다고 기록됐다. 하지만 왕건은 멸망 직전인 신라를 우호적으로 대했고, 마치 신라의 복수전처럼 후백제와 대구 팔공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포위됐다가 신숭겸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왕건을 지켜본 신라인들은 이미 고려의 백성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그는 무려 29명에 달하는 유력한 호족의 딸들을 부인으로 뒀다. 이러한 혼인정책을 추진해서 강력한 지방세력들을 군사적인 충돌, 희생 없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분점하고, 통일의 실질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심지어는 통일 후에도 경순왕에게 딸인 낙랑공주를 부인으로 줬다. 적이던 견훤은 물론이고, 끝까지 저항한 그의 아들인 신검도 살려줬다. 그는 군사지향적이고 야심만만하며, 반란을 일으킨 인물 치고는 드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해양정책을 토대로 통일과 외교에 성공
왕건이 성공한 비결은 해양활동의 역할과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용했다는 점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지중해 서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경기만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작제건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내륙 하항도시인 개주(개성)를 비롯해 정주(풍덕), 염주(연안), 백주(배천) 4개 주와 강화 등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가 만나고 황해와 한강하류와 예성강이 합쳐지는 소지중해에서 성장한 해상호족이었다.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는 해상세력이 물류체계를 장악한다면 경제력과 정치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해륙 및 수륙교통의 요지다.

그는 903년 3월, 해양호족들과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남부로 내려가 나주 지역과 인근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 909년에는 해군대장군으로서 나주를 지켰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했다. 910년에는 70여 척의 배에 2000여 명씩 싣고 후백제를 원정했다. 왕건 세력이 초기의 열세를 뒤집고 후백제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배경에는 ‘백선장군’ ‘해군대장’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의 강력한 수군력이 있었다.

또 하나, 국제 환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양을 외교전에 활용했다. 923년에 강남의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또한 답례를 받았다. 북쪽의 후량·후당·후진 등 화북의 나라들에 사신을 자주 파견했고, 특히 후당은 925년을 시발로 짧은 기간에 8번이나 보냈을 정도였다. 시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는 해양의 중요성과 해양력 강화가 국가 발전의 토대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후 고려는 해양활동 능력을 바탕으로 군사적인 활동은 물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외교, 국제무역, 국내 조운 등에 활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문화적으로 성숙했다.
정체성과 사상의 중요성…미래 내다보는 통일군주
왕건은 신흥국인 고려의 정체성과 사상, 그리고 미래의 국가발전 정책까지 해결하려는 지도자였다. 북쪽에서 동족인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취약한 국력의 운명을 걸고 군사적인 능력이 검증된 요나라와 직접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 발해 유민들을 수용해서 거주지를 마련했다. 거란은 적대국으로 인식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고,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둬 죽게 했다. 이는 왕건의 단호한 자세와 고려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국제적으로 선언했고, 북상해서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나라의 국시, 즉 후대의 임금들이 추진할 국가발전 정책의 대강을 발표했다. 이것이 훈요 10조다. 그 가운데 제 7조는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민심을 얻어야 한다’이다.
√ 기억해주세요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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