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정보 요구 제출 시한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정보 공개 수위에 막판 고심을 하고 있다. 민감한 기밀과 고객사 이름을 명시하는 대신 산업별 현황을 제출하는 등 묘책 찾기에 골몰하는 가운데 미국 측의 무리한 요구가 매년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핵심 자료 속속 제출
6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가 반도체 관련 정보를 제출하도록 요구한 사이트에 21개 기업들이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은 제출된 자료에 대해 공개·비공개를 선택할 수 있는데 21곳 중 13곳이 공개를 선택했다.특히 세계 7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이스라엘 타워세미컨덕터는 고객 정보에 대해 업체명을 기재하지 않고 산업군으로 뭉뚱그렸다. 또 반도체 정보는 제품 종류와 소재, 활용하는 공정 노드(nm), 납품 기간(리드 타임) 등의 일부만 공개했다. 제품 가격이나 판매량, 고객사 등 민감한 정보는 비웠다.
세계 1위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업체인 대만의 ASE와 미국 차량용 부품 제조업체 오토키니톤, 미국 인쇄회로기판(PCB) 기업 이솔라 등도 제출했고 코넬대와 UC버클리 등 대학에서도 미 정부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이 공개한 자료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지만 '기밀'(Confidentail)로 제출한 자료는 미 상무부만 열람할 수 있다.
이들 기업이 선택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배경에는 미국 측의 태도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3일 워싱턴DC 소식통에 따르면 미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이 노출을 꺼리는 민감한 내부 정보 대신 자동차용, 휴대전화용, 컴퓨터용 등 산업별로 제출하겠다는 기업들의 요청을 용인했다.
미국 역시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이라는 '큰 그림'이 목표여서 굳이 업체명까지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개별 기업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기업의 우려 사항을 미 정부에 지속적으로 전달한 점도 절충안에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도 영업상 비밀유지 조항에 저촉되거나 민감한 내부 정보를 제외하는 선에서 최종 자료를 정리 중이다. 지난달 26일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 코엑스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달 28일 서울 코엑스에서 "내부 검토 중이고, 정부와도 이 건에 대해 소통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정보 제공 어느 선까지 했는지 미국이 차등 분류할 것"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업별로 정보 제공을 어느 선까지 했는지 미국 내부적으로 차등 분류해 관리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정보가 향후 미국 내 사업 과정에서 제약의 이유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바이든 정부가 내세우는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라는 명분보다 그 이면에 깔린 미중갈등 국면에서 미국에 얼마나 협조를 하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 아니겠나"라고 추측했다.실제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G20 정상회의와 별도로 중국을 겨냥한 글로벌 공급망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도 한국 기업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글로벌 물류대란과 공급망 문제를 다룬 이 회의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유럽 주요국인 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 쿼드 참여국인 인도·호주·일본, 캐나다·싱가포르 등 미국의 주요 동맹 14개 국가 정상이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공급망 문제는 어느 나라의 일방적인 조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동맹국 간 조율이 핵심"이라고 재차 동맹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단일 공급원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공급망을 다각화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하며, 이를 위해 회의 참가국에 암묵적으로 미국 편에 설 것을 요구한 것으로 읽힌다.
아울러 바이든 대통령은 회복력 있는 공급망 구축을 위해 △투명성 △다양성과 개방성 및 예측 가능성 △안전성 △지속가능성 등 4가지 핵심 축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이를 두고 다시 한 번 정보 제출을 압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정보 제출을 '산업'이 아닌 '안보'와 '한미동맹' 차원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중국 시장을 아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반대 목소리도 힘을 내고 있다. 한국 수출의 5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반도체는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의 '10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111억7000만달러로 전체 한국 10월 수출액 555억5000만달러의 20.1%를 차지했다. 이중 중국으로의 수출액은 36억7000만달러로 전체 반도체 수출액의 32.8%를 차지했다. 미국 수출액은 5억8000만달러였다.
반도체 공동 대응 '삼성전자-정부' 드림팀 뜰까
때문에 삼성전자와 정부가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로비 활동과 설득 과정에 한국의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우선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오는 9~11일 미국 방문길에 올라 한미 양국 간 산업·에너지 협력 강화 및 철강·반도체 등 현안을 대응하기로 했다. 방미 시점은 정보 제출 기한이 끝난 직후이지만 문 장관은 방미 기간 지나 레이몬도 미 상무부 장관과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을 잇달아 면담할 예정이다.
문 장관은 레이몬도 장관과 만나 한국 반도체 기업이 낸 자료를 설명하고 추가 자료를 내기 어려운 사정 등을 설명할 것으로 전망된다. 각국의 반도체 기업에 정보를 요구한 주체가 미 상무부라는 점에서 문 장관과 레이몬도 장관의 면담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번 사태 해결사로 나설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부회장은 20조원 규모의 미국 내 삼성전자 제2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부지를 결정하기 위해 이달 중 미국 출장을 계획 중이다.
이 부회장은 출장 기간 미국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민감한 반도체 정보가 공개되지 않도록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부회장은 이르면 주말께 출장길에 오를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지만 오는 18일 재판이 휴정되면서 둘째 주나 셋째 주 사이에 출장을 떠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대만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가 어떻게 나올지 가장 관심이 크다"며 "정보 제출 요구가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향후 대책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확실한 방어 전략은 과감하고 선제적인 연구개발(R&D) 투자"라며 "기술적으로 우리가 우위에 서야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