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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그려낸 사물의 이면…'현대사회 시대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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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의 네모 칸으로 이뤄진 그림이 체스판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단순한 체스판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물이 들어 있다. 주전자와 컵, 촛대, 음료 캔, 와인병, 노트북, 스마트폰, 서큘레이터, 의자, 화분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강렬한 흑과 백의 대비에, 입체적인 형상으로 멀리서도 눈길을 끄는 정물화가 일상의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박준석 작가(35) 초대전 ‘Ordinary things’가 11월 1일부터 열린다. 정물화 ‘Translate’ 시리즈를 비롯해 숲속의 나무를 형상화한 ‘Circonstance’ 시리즈 등 29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박 작가는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사물을 다시 한 번 잘 들여다보라고 하는 작품”이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현대사회의 시대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6~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나타났던 바니타스적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당시 네덜란드 정물화는 사물을 통해 공허함, 헛됨, 죽음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박 작가의 정물화도 이와 비슷하게 대량 생산된 후 쉽게 사용되다 버려지는 사물을 통해 현대사회의 이면을 드러낸다. 충전선이 빠진 휴대폰이라든가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에선 풍자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스티커를 붙인 거냐, 컴퓨터로 출력한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그의 작품은 모두 물감으로 그려졌다. 흰 바탕 혹은 검은 바탕에 종이테이프나 시트지로 마스킹을 하고 바탕과 반대되는 색으로 칠하는 방식이다. 마스킹을 떼어내면 흑과 백의 패턴이 나타난다. 패턴이 복잡하다 보니 먼저 컴퓨터로 그려본 다음 캔버스에 작업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아주 밝은 빛만 있는 곳에 사물을 놓았을 때 그것을 눈으로 인식할 수 있을지, 반대로 아주 어두운 공간에 사물이 있다면 거기에 물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며 “그때부터 흰색과 검은색만 사용해서 형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흑과 백은 어둠과 빛,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다. 흑과 백의 패턴은 눈의 착시를 일으키는 효과도 낸다. 정물화에서는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고, Circonstance 시리즈는 흑과 백의 선으로 숲이나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주변 환경에 따라 나무로 보이기도 하고, 테이블에 흘러내린 커튼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전시에서는 작품을 거는 벽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의 특성상 하지 못했지만, 다른 전시에서는 벽에 검은색 선으로 탁자나 장식장, 창문 등을 함께 표현한다. 그의 정물화는 탁자 위에 놓인 화분,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옆에 놓인 의자, 혹은 벽에 걸린 액자 등으로 변신한다. 이를 통해 그는 공간이 갖는 경계를 허문다. 그는 “벽에 그린 임의의 공간을 통해 별개로 존재했던 각각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며 “이는 따로 떼어놓고 작품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설명했다.

박 작가는 “소재를 확장해가며 일상의 사물을 새롭게 보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며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사물도 작품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5일까지.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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