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원 사이에서 요즘 가장 화제를 모은 ‘최고의 사장님’은 보정속옷 회사 스팽스(Spanx)의 세라 블레이클리 최고경영자(CEO)다. 블레이클리는 최근 “스팽스 직원 모두에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일등석 항공권 두 장씩을 선물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인당 여행경비 1만달러도 지급했다. 스팽스 직원들은 남극, 보라보라섬 등 다양한 여행지 가운데 어디를 택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블레이클리는 미국 투자회사 블랙스톤의 스팽스 투자를 기념하고 직원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블랙스톤은 스팽스의 기업가치를 12억달러(약 1조4000억원)로 평가하고 투자를 결정했다고 지난달 20일 발표했다.
‘투잡’ 뛰며 자수성가 억만장자로
블레이클리는 1971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태어났다. 플로리다주립대에 진학해 변호사를 꿈꿨다. 하지만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을 위한 시험(LSAT)에서 두 차례 고배를 마시며 법조인의 꿈을 접었다. 그는 플로리다주의 한 사무용품회사에 취업해 팩스 판매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영업하면서 수많은 거절을 당해본 경험은 이후 사업가에게 필요한 기본기로 이어지게 된다.그러던 중 블레이클리는 여성 직장인 대부분이 매일 착용하는 팬티스타킹에 불만을 품게 됐다. 팬티스타킹은 허리부터 발가락까지 일체형이라 발끝이 노출되는 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팬티스타킹을 착용하지 않자니 몸매 보정 효과를 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블레이클리는 팬티스타킹의 다리 부분을 잘라내 착용했다. 다른 여성들이 관심을 보이자 그는 사업성을 확신하게 됐다.
블레이클리는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저녁에는 사업을 하는 ‘투잡’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기존 특허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자신이 개발한 다리 없는 팬티스타킹과 비슷한 제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직접 특허 신청을 했고, 양말공장에 전화를 돌려 생산을 부탁했다. 자본금은 회사 생활을 하며 저축한 5000달러였다.
스팽스를 창업한 2000년 미국 백화점 니만마커스에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블레이클리는 담당자를 화장실로 데려가 속옷을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며 설득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기회도 그해 찾아왔다.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제품 중 하나로 스팽스를 꼽았기 때문이다. 블레이클리가 윈프리에게 스팽스 제품을 전달한 효과였다.
회사 웹사이트도 없을 만큼 영세했던 스팽스에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제야 블레이클리는 사무용품회사를 그만두고 투잡 생활을 청산했다. 스팽스는 설립 초기부터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블레이클리는 광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코카콜라 등에서 경영 경험을 쌓은 로리 앤 골드먼을 임원으로 영입하며 회사의 틀을 잡아갔다.
블레이클리는 유명인(셀러브리티)을 통한 마케팅 효과를 일찍부터 깨닫고 이를 잘 활용한 경영자로 꼽힌다. 블레이클리는 영국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의 2004년 리얼리티TV쇼에 출연해 유명인사가 됐고, 홈쇼핑 채널에 출연해 직접 스팽스 제품을 팔기도 했다. 스팽스가 광고 없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2014년 미셸 오바마 당시 미국 영부인도 “우리 모두 스팽스를 입는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블레이클리를 ‘세계에서 가장 젊은 자수성가형 여성 억만장자’로 선정했다. 블레이클리는 래퍼 출신 사업가 남편과 결혼해 여러 자녀를 둔 ‘워킹맘’이기도 하다.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해 매출 늘려
스팽스는 보정속옷을 넘어 레깅스, 청바지와 치마, 남성용 속옷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진입장벽이 높지 않아 경쟁자가 속속 나타나는 치열한 속옷업계에서 스팽스는 가장 성공한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가 소비자에게 직접 상품을 판매하는 D2C(Direct to Consumer) 채널을 적극 활용한 결과다. 앤 청 블랙스톤 글로벌소비자부문 대표(전무)는 “스팽스 브랜드를 향한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매우 높아 스팽스의 신제품도 적극 구매하는 경향이 뚜렷했다”고 평가했다. 스팽스 매출의 70%가 D2C 채널에서 창출되고 있다. 백화점 등 유통업체를 통하는 것보다 이익률이 좋아 회사 실적에도 기여하고 있다.코로나19로 출근 등 외부 활동이 줄어들어 주력 제품인 보정속옷 수요에 타격이 있던 지난해에도 스팽스는 3억~4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019년 미국 방송인 킴 카다시안이 내놓은 보정속옷 브랜드 스킴스 등 경쟁사들의 빠른 사업 확장에 스팽스의 시장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스팽스는 소비자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제품을 내놓고 있는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블레이클리가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여성 소비자들은 몸매보정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는 속옷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여성 사업가는 당시 많지 않았다. 블레이클리가 속옷 제조나 디자인 경험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고 시장 초기 진입자로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다.
블랙스톤은 스팽스의 성장성을 높이 평가하며 지분의 절반을 인수하기로 했다. 블레이클리는 주요주주 지위를 유지하며 스팽스 경영을 이어가기로 했다. 전자상거래 확대, 제품군 및 진출 국가 확장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