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북서쪽 리젠츠공원에 거대한 가건물이 들어섰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 최대 미술장터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열린 지난 13~17일, 세계 3대 아트페어의 하나인 ‘프리즈(Frieze) 런던 2021’이 여기서 개최됐다. 코로나19 여파로 2년 만에 대면 행사로 열린 올해 프리즈에선 ‘다양성’이 중요한 흐름으로 떠올랐다. 더 많은 지역의 다양한 배경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이 전면에 배치돼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젊은 작가들의 부상, 온라인을 통한 작품 구매도 이번 행사에서 두드러졌다.
여성 작가들이 작품 판매 주도
흑인 여성 최초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나서는 시몬 리는 높이가 2m를 넘는 조각상 ‘빌리지 시리즈’(2021)를 올해 프리즈에 선보였다. 짚으로 만든 치마를 입은 아프리카 여성을 표현한 도자 조각상으로, 75만달러(약 9억원)에 팔렸다. 뉴욕타임스는 “1990년대 아트페어를 데미언 허스트 등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YBA)’이 이끌었다면 지금은 유색인종 작가와 여성 작가들이 전면에 나서 작품 판매를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전시회장 입구엔 크로아티아 출신의 젊은 여성 작가인 노라 투라토의 발광다이오드(LED) 작품이 줄지어 걸렸다. ‘당신이 원했던 모든 것과 두려워했던 모든 것’ 같은 글귀가 적힌 전광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아흐메트 마테르의 도발적인 조각상 ‘독수리’(2021)는 미국 공군의 공격용 드론 프레데터를 3차원(3D) 모형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접착제를 발라 모래를 덮었다.
고(故) 루이즈 부르주아의 2004년 핑크 풍선껌 조각 작품이 240만달러(약 28억원)에, 미국 여성 화가 로이 할로웰의 ‘모유 수유 이야기’(2021)는 17만5000달러(약 2억원)에 팔렸다. 영국과 홍콩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클라우디아 쳉은 미술 전문지 아트시에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렸다”며 “올해 프리즈 런던은 다양성과 포용성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20~30대 젊은 작가들 큰 인기
전시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코로나19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작가들이 코로나19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불가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프리즈 작품들은 보수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전했다. 새뮤얼 레비 존스는 해체한 책을 꿰맨 작품에 ‘둠’(2021)이란 제목을 붙였다. 마틴 그로스의 오일 파스텔 작품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긴다.‘프리즈 위크’로 불리는 영국 프리즈는 2000년 이후 작품을 전시하는 ‘프리즈 런던’과 고대 미술품부터 20세기 작품까지를 다루는 ‘프리즈 마스터스’로 나눠 열렸다.
프리즈 런던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린 것은 예전과 같았지만, 올해는 유독 20~30대 젊은 작가들이 비싼 값에 작품을 팔았다. 프리즈 기간 열린 경매에서 20대 흑인 여성 작가 자데이 파도주티미는 왕립예술대학 졸업 작품으로 만든 추상화가 110만파운드(약 18억원)에 팔려 화제를 모았다. 다른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최저 제시 가격보다 10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팔렸다. 미술 전문지 디 아트 뉴스페이퍼는 아시아 구매자들의 유입과 작가들이 연예인처럼 형성한 팬덤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3년 런던에서 처음 열린 프리즈는 스위스의 아트바젤, 프랑스의 피아크와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힌다. 2012년부터 미국 뉴욕, 2019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로 개최지를 넓혔다. 내년부터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된다.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KIAF와 손잡고 같은 기간·공간에서 프리즈 서울이 열린다. 디 아트 뉴스페이퍼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는 홍콩의 대안으로 서울이 세계적인 미술시장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며 “세금이 우호적이고 수집가들의 취향이 중국보다 다양한 것도 서울의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