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교수가 말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대전환’으로 요약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상생활의 대전환, 미·중 패권경쟁에 의한 외교사적 대전환,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권력의 대전환 등이다. 이 같은 전환기에 우리 국민과 지도층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생각하지 않는 이는 과거를 답습하며 이념과 같이 정해진 답을 찾지만, 생각하는 이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질문하며 새로운 발전을 갈구한다는 설명이다. 대전환기 한복판에서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듣기 위해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이 최 교수를 만났다.
▷한국 지도층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봐야 하는 대로만 본다는 점입니다. 모든 실책이나 실패는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합니다.”
▷언제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지요.
“외교 문제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항상 여러 패권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 패권들 사이에서 잘못된 판단을 많이 했죠.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같은 모습을 보고 정반대로 보고하는 바람에 조선이 제때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명청 교체기에 주자학이란 이념에 갇혀 명을 따르다가 청에 의해 국토가 유린된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외교에서는 어떻습니까.
“미국과 중국을 대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명청 교체기 조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현 집권세력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현실적인 국력 차이는 고려하지 않고 이념적 지향성에 의해 친중 노선을 따르고 있죠.”
▷친중론자들은 17세기 신흥 강국이던 청을 중국에, 가라앉는 명을 미국에 비유합니다.
“명청 교체기엔 청나라가 명나라를 압도한다는 사실이 명확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을 압도하나요?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자유의 수준으로 보나 중국은 아직 미국에 훨씬 뒤처져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어디가 강국인지 명확한데도 우리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북한과의 동포주의와 같은 이념에 의해 친중 노선을 타고 있죠. 이렇게 현실보다 이념에 따라 외교관계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과 명청 교체기의 조선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힌 원인이 뭘까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남들이 생각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어요. 특히 진영논리에 갇혀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했죠.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정해진 진영논리를 누가 큰 소리로 내뱉느냐, 얼마나 많이 확대·재생산하느냐가 중요하죠. 국민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시대적 과제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니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질문합니다. 질문하면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미래로 나아가죠. 반대로 생각 능력이 없는 사람은 대답에만 빠져 있어요.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질문하지 않고 대답하는 훈련만 하고 있습니다.”
▷산업화·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입니까.
“중진국에서 선도국으로 넘어가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산업혁명이 무르익은 1820년대 이후 중진국에서 선도국으로 넘어간 나라는 한 곳도 없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수준만 보면 중진국 최상위 레벨까지 올라선 유일한 나라가 됐습니다. 경제력만으로는 선도국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바탕으로 정신적 진보가 있어야 하는데 이념에 의한 진영정치가 심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국가 미래를 논의할 장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국가 레벨을 논의할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 레벨의 사유라는 것은 이성적 사유입니다. 국가는 실체적인 조직이고 법률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죠. 반면 민족은 감정적인, 상상의 공동체입니다. 한국 정부는 국가보다 민족을 우선시하려고 합니다. 국가 레벨의 이성적 사유가 불가능한 상황이죠.”
▷그럼에도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 문화를 보면 희망은 있어 보입니다.
“방탄소년단(BTS), ‘오징어 게임’ 등 최근 국력 신장을 이끄는 분야는 모두 정치에서 벗어난 영역이에요. 정치 간섭이 없으니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이 가능한 것이죠.”
▷뭐든 내버려두는 것이 나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특정 방식대로 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회가 아니라 마음껏 알아서 살라고 말하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관리하고 통제하려 하기보다 되도록 많은 부분을 허용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 슬로건이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입니다.
“왜 일반 국민의 삶을 국가가 책임집니까. 국가가 허울 좋은 말로 뭔가를 책임진다고 할수록 자유는 사라집니다. 언론중재법, 5·18특별법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민주를 위한다면서 집권세력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어요. 결국 자칭 민주진영이란 자들에게 민주화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구호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민주화를 주도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모습이 아이러니컬합니다.
“노자의 가르침 중에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 앉지 말라는 뜻입니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신이 타도하려는 대상을 타도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면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완장을 찬 반항아들이 혁명가 행세를 하고 있죠.”
▷청년들이 뭘 보고 배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선 교육이 가장 중요한데,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교육 현장입니다.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접하면서 배우는 분야가 정치죠. 그런데 한국 정치를 보고 청년들이 뭘 배우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자리만 유지하면 된다는 위정자의 모습이 결국 청년에게 ‘어떤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직장만 가지면 된다, 돈만 벌면 된다’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친일 청산에 부정적 목소리를 내오셨습니다.
“친일이 좋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 정부가 왜 친일 청산을 하려 하는지 목적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친일 청산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는 차원이어야 합니다. 독립정신이 희미해지는 순간 친일 청산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정부의 독립정신이 부족하다는 건가요.
“독립정신은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구한말 조선은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외교권을 사실상 빼앗깁니다.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조선은 청나라 속국에서 일본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죠. 이런 역사를 경험했으면서도 친일 청산에만 목을 매고, 중국에는 스스로 굴종을 받아들입니다. 이번 정부 주중대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썼습니다. 이 말에는 제후국 조선이 천자국 명나라를 받들어 모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독립의 정신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면서 어떻게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국가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 이들에겐 국익보다 중요한 것이 이념과 진영입니다. 국익이라는 기준 아래 대한민국을 독립적으로 우뚝 세우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독립을 지키기 위해 지도자는 어떤 나라가 우리의 영토·역사·문화를 존중하는지, 욕심을 내는 주변국은 없는지 예민하게 살펴야 합니다.”
■ 최진석 교수는
노장사상 연구한 도가 권위자…5·18특별법 비판으로 주목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도가(道家) 사상 전문가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석사 학위, 중국 베이징대에서 도가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노장사상 연구한 도가 권위자…5·18특별법 비판으로 주목
노자와 장자의 사상, 삶의 태도 등을 중심으로 대중 강연을 펼쳐온 그는 지난해 12월 ‘나는 5.18을 왜곡한다’는 시(詩)를 개인 SNS에 올리며 지식인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시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면 형사 처벌을 받도록 하는 5·18특별법이 자유를 위축시키고 민주주의 정신을 위반한다는 비판이 담겼다.
최 교수는 지난달부터 ‘생존 철학’을 주제로 유튜브 영상을 찍고 있다. 대중 강연 영상을 유튜브에 공유한 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유튜버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개월 남짓이다. 최 교수는 “생존을 위해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생각 방식을 공유하고 싶었다”며 “한국이 생존·발전하기 위해선 철학적 높이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9년 전남 함평 출생
△1986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
△1988년 서강대 동양철학 석사
△1996년 베이징대 도가철학 박사
△1998~2017년 서강대 철학과 교수
△2005~2007년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2018년~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2019년~ 새말새몸짓 이사장
정리=정의진 기자/사진=허문찬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