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결론 못 내는 담합 사건
14일 정치권과 해운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해운사 과징금 부과 여부를 확정할 전원위원회를 다음달 열지 않기로 잠정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해운사 공동행위에 대해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지 않는 해운법 개정안이 국회 농해수위 소위원회를 통과한 상황에서 공정위가 사건 처리를 강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공정위는 이번 해운사 담합 사건을 제재할 수 없게 된다. 공정위 안팎에선 12월 전원회의 상정조차 어려워 연내 처리가 물 건너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정위는 지난 5월 국내외 선사 23곳이 동남아시아 노선에서 담합했다는 판단에 따라 최대 80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2018년 12월 조사를 시작한 지 2년6개월 만이었다. 국내 선사는 SM상선, 장금상선, 고려해운, 흥아해운 등 총 12곳이다. 이들이 물어야 할 과징금만 최대 5600억원에 달한다. 공정거래법상 업체들의 가격 및 입찰 담합은 불법이다.
해운업계는 공동행위가 해운법에 명시된 ‘합법 사항’이라고 항변한다. 해운법 29조는 ‘해운사들은 운임·선박 배치, 화물 적재 등에 관한 계약이나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원활한 글로벌 물류 소통을 위해 공동행위가 필요하다는 국제사회 규범을 준용한 것이다. 핵심은 해운법이 허용하고 있는 공동행위 범위를 넘어서는지 여부다. 공정위는 해운사들이 화주들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운임을 인상했다고 보고 있다.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에 운임 신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봤다. 반면 적법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해운업계의 설명이다.
양측 갈등에 청와대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공정위가 과징금 8000억원을 부과할 경우 가까스로 부활에 성공한 국내 해운업계가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내세운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의 성과가 퇴색할 수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최근 한국무역협회에 양측의 입장을 조율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때 투자 못하는 해운업계
해운업계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 해운사 관계자는 “어느 정도의 과징금을 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년 선박 발주 등 선복량 계획 수립조차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들어 해운업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한 상황에서 공정위 과징금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적기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해운업계의 불만이다.해운업계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외국 선사들은 국내 선사가 막대한 과징금을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동남아시아 노선은 국내에선 대부분 중소형 선사가 운항을 전담한다. 중소형 선사가 운항하는 선박도 1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규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형 외국 선사들이 동남아 선사에 본격 진입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해운업계의 설명이다. 해운사 관계자는 “대형 외국선사들이 동남아 노선에 투입되면 중국에서 출발해 동남아 지역 노선 화물을 쓸어담은 채 미국이나 유럽으로 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해수부에 따르면 한국의 선복량 점유율은 작년 1월 기준 3.9%로 세계 7위다. 그리스가 선복량 순위 1위를 차지했고 이어 일본, 중국, 싱가포르, 홍콩, 독일 등의 순이었다. 한국은 2014년엔 점유율 4.7%로 5위를 차지했지만 한진해운 파산 영향으로 순위가 하락했다. 점유율도 매년 낮아지는 추세다.
대형 로펌 관계자는 “소급조항이 담긴 해운법 개정안은 본회의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권과 업계 반발을 고려해 공정위가 1000억원가량의 과징금을 부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공정위가 부과한 8000억원은 해운사 담합에 따른 매출(8조원)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은 “과징금 규모는 전원위에서 합의를 통해 결정하기 때문에 현재 결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강경민/정의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