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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당근마켓' 시총 1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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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가현에 사는 히로씨(80)는 만년필 수집가다. 1000개가 넘는 만년필을 모았다. 얼마 전부터 중고거래 앱 메루카리를 통해 갖고 있던 만년필을 하나씩 팔고 있다. 애착이 가지만 임종을 생각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죽으면 결국 짐일 뿐.’ 히로씨는 메루카리를 통해 벌써 200개의 만년필을 팔았다.

일본인에게 중고거래는 삶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거래를 손쉽게 중개해주는 중고거래 앱 메루카리는 상장 3년 만에 기업가치 1조엔의 기업이 됐다.
익숙한 중고거래를 훨씬 편하게

2013년 설립된 메루카리는 일본의 첫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이다. 2018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3일 종가는 6440엔. 이날 기준 시가총액은 1조273억엔에 달했다. 올 들어 상승률은 40.77%에 달한다. 코로나19로 주가가 폭락했던 저점 대비로는 314% 올랐다.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기업이지만 비즈니스 모델 자체는 익숙하다. 일본에선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중고거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조차 온 가족이 나눠 쓰던 일본인들이 버블 경제 붕괴를 계기로 물건을 더 아껴 쓰게 됐다.

메루카리는 익숙한 중고거래를 앱으로 옮겨왔다. 판매자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앱에 올린 뒤 원하는 판매가격을 적기만 하면 된다. 국내 당근마켓과 비슷하다. 차이는 직거래가 아니라는 점이다. 올린 제품을 누군가 구매하겠다고 하면 앱에 알림이 뜬다. 판매자는 이를 클릭한 뒤 택배 상자 사이즈만 지정하면 바코드가 생성된다. 바코드엔 판매자와 구매자의 주소가 자동으로 등록된다. 판매자는 바코드를 제시하고 물건을 편의점에 맡기기만 하면 거래가 종료된다.

이 같은 편리함은 메루카리를 매달 수천억엔이 거래되는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지난 4~6월 거래액은 2082억엔이었다. 5년 전 같은 기간엔 총거래액이 396억엔에 불과했다.

메루카리는 구매자가 지불한 대금을 일단 맡아두고, 구매자가 물건을 받은 뒤 ‘문제가 없다’고 확인하면 수수료 10%를 떼고 판매자에게 건넨다. 거래가 늘어날수록 수수료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다.
코로나 이후 임종 준비 급증에 흑자전환
코로나19는 메루카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노년층이 코로나로 임종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임종 전 주변을 정리하는 도구로 메루카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메루카리는 코로나19 이전(2019년 4월~2020년 3월)과 이후(2020년 4월~2021년 3월) 이용자를 조사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60대 이상 이용자 수는 1.4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종준비활동(終活·구직활동을 뜻하는 ‘슈카쓰’와 발음을 동일하게 만든 신조어)’을 키워드로 등록한 판매 물건 개수도 이전에 비해 1.6배 증가했다.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60대 중 66.5%가 임종 준비를 의식하고 있고, 이 중 52.4%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임종 준비에 대한 생각이 더 강해졌다고 답했다.

메루카리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연령대는 20대지만, 60대 이상 이용자는 고가 물품을 거래하고 있다. 2019년 메루카리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이용자의 월평균 판매금액은 3만엔 안팎으로 20대의 약 1.5배에 달했다. 노인들의 슈카쓰 덕분에 6월 결산법인인 메루카리는 올해 창사 이후 첫 흑자를 달성했다.
BNPL·전자상거래 플랫폼까지
메루카리는 새로운 먹거리 창출도 하고 있다. 첫째는 핀테크다. 메루카리는 물건 판매대금을 다른 은행에 송금하지 않고 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레스토랑과 편의점 등 일본 전국 170만 곳에선 메루카리 앱 바코드만 제시해도 결제할 수 있다. 요즘 주목받는 BNPL(선구매 후지불) 서비스도 하고 있다. 지난 7일부터는 누구나 온라인에 간단히 자기 매장을 낼 수 있는 플랫폼 ‘메루카리숍’도 열었다. 네이버의 스마트스토어와 비슷한 플랫폼이다. JP모간은 “메루카리숍이 메루카리의 성장 잠재력을 크게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며 투자의견 ‘비중 확대’와 목표주가 6900엔을 제시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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