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란 말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친한 친구’를 칭하는 우리말 단어인데 ‘베프’라는 외국어 줄임말보다 훨씬 정감이 가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도 잘 몰랐던 한글·한국어의 매력이지요.”
권재일 한글학회장(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사진)은 최근 세계적인 한류 열풍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무척 감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100여 년 전 한글학회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우리말이 어느새 세계인이 보고 배우는 말이 돼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한글학회는 국내에서 1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보기 드문 학술단체다. ‘말글이 살아야 민족이 살고, 민족이 살아야 국가가 산다’는 믿음 아래 1908년 조직돼 올해로 창립 113주년을 맞았다. 최초의 한국어 대사전인 ‘조선말큰사전’을 만든 것도, ‘한글날’을 기념일로 제정한 것도 한글학회의 공이다.
뜨거워진 한국어 학습 열풍을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575돌 한글날을 앞둔 지난 5일 권 회장을 서울 종로구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권 회장은 “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뒷받침된다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풍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이보다 앞서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한국어를 올바르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그린뉴딜’ ‘서울Learn’ ‘부스터샷’ ‘위드코로나’처럼 공공기관들이 외국어를 지나치게 사용해 오히려 국민이 정책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글학회는 지난 5월 바른한국어인증원을 설립해 정부 공공문서의 우리말 사용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권 회장은 “우리말보다 외국어를 쓰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앞으로는 우리말을 잘 쓴 기관을 선정해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학습 열풍이 불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문해력’은 점차 떨어지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학업성취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2006년 세계 1위에서 2018년 6위까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매체에 익숙해지면서 학생들이 점차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고 있다는 게 권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단순히 유튜브 탓만 하는 것보다 새 시대에 맞춘 새로운 교육법을 발굴해야 한다는 데 학계가 공감하고 있다”며 “한글학회가 매년 한글날을 맞아 진행하는 학술대회도 올해엔 ‘한국어 교육’을 주제로 정했다”고 했다.
평생을 국어연구에 매진한 권 회장은 국립국어원장 시절엔 ‘짜장면 원장’으로 유명했다. ‘자장면’만 표준어로 인정하던 오랜 관행을 깨고 ‘짜장면’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면서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한글학회에서도 끊임없는 ‘점진적 변화’를 계속해나가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권 회장은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한글 연구를 접목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아 이들을 위한 연구비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며 “한글학회가 오래됐지만 ‘노쇠’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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