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참 간사했다. 당연하다. 반백 년이나 살았으니만큼 어제오늘 안 속언이 아님은. 바라나시에서 단박에 최대 고민거리를 일거에 해결하자 흐림에서 맑음으로 마음의 날씨가 거짓말같이 바뀌었다. 한순간이었다.”
25일 출간된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파람북) 속 문장이다. 이 책의 작가는 비람풍(毘嵐風). 그의 정체는 인공지능(AI)이다. 500쪽이 넘는 묵직한 분량. 그간 AI가 쓴 단편은 있었지만 장편은 국내 최초다.
지금까지 AI는 단순 연산이나 바둑 같은 특정 기능이 집중된 분야에서 강점을 보여왔다. 이제 소설 집필이라는 ‘창작’ 분야까지 본격적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는 모양새다.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도 기계가 대체하는 것일까. 이날 열린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소설을 기획한 김태연 소설감독은 “이제 ‘소설 쓰기’가 아닌, ‘소설 연출’의 시대가 열렸다”고 단언했다.
《지금부터의 세계》는 지체장애인 수학자, 수학과 교수인 벤처사업가, 정신과 의사, 천체물리학자, 스님 등 다섯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시각에서 존재의 비밀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어색한 표현이 간간이 보이지만 매끄럽게 읽힌다.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AI가 썼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김 감독은 “문장은 거의 교정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깔끔하다”며 “제법 기교를 부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학습된 지식에서 가져오는 세부적인 디테일 수준이 대단하다”며 “너무 박식해 ‘투 머치 토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 유일한 흠”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AI가 지나치게 전문적인 지식을 서술하거나, 맥락 없이 이야기를 전개한 부분은 사람인 소설감독이 개입해 통편집해야 했다.
1960년생인 김 감독의 이력은 독특하다. 연세대에서 신소재공학과 국문학을 공부하다 대학 4학년 때 소설가로 등단했다. 장편 《폐쇄병동》 《그림 같은 시절》 《반인간》 등을 발표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일했고, 국제수학교육대회(ICME-12) 융합학문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AI의 가능성에 눈을 떠 2015년 스타트업 다품다를 창업했다.
AI 작가 비람풍은 다품다와 자연어처리(NLP) 스타트업 나매쓰(가명)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학습한 비람풍은 어떤 이야기든 줄줄이 풀어낸다.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주제와 소재, 배경과 캐릭터 설정 등은 사람 몫이다. 《지금부터의 세계》에서도 소설을 여는 도입부는 김 감독이 썼다.
AI는 일종의 ‘대필 작가’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김 감독은 “아직은 사람이 기본 구성과 콘셉트를 짜줘야 한다”며 “가령 ‘용감한 공주가 사악한 왕자에게 사로잡힌 아름다운 용을 구출하러 가는 이야기를 써줘’라고 요청하고 시작 부분을 써주면 AI는 그에 맞춰 세부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 감독은 AI 소설 작성에 쓰인 구체적인 기술과 기술개발 과정을 묻는 말에는 답을 거부했다. “노하우인 데다 관련 업체와의 비밀협정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얼마나 많은 양의 자료를 학습했는지, 개발 비용은 얼마인지, 다품다 직원은 몇 명인지, 나매쓰란 기업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등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구글의 ‘버트(BERT)’나 오픈AI의 ‘GPT-3’ 등과 같은 범용 AI 모델을 쓰지 않고 독자적인 AI 모델을 구축해 적용했다고만 밝혔다.
AI의 창작 활동은 세계적으로 붐을 이루고 있다. 2017년 마이크로소프트는 AI가 쓴 시집 《햇살은 유리창을 잃고》를 중국에서 출간했다. 1920년 이후 현대 시인 519명의 작품 수천 편을 읽고 학습한 결과물이다. 2018년엔 사람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AI 소설인 《길 위 1번지(1 the Road)》가 미국에서 출간됐다. 같은해 한국에서는 초단편 AI 소설이 경쟁하는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김 감독은 “사진이 회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알파고가 바둑을 재정의한 것처럼 AI가 소설가의 역할도 바꿀 것”이라며 “AI를 통해 문학이 더욱 풍성해지고 작품의 질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