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는 ‘한국 선수 천하’라고 부를 만했다. 1998년 박세리(44)가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을 제패한 뒤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 등 박세리에게 영감을 받은 ‘세리키즈’가 투어를 주름잡았다. LPGA 최고 권위 대회인 US여자오픈은 지난 10년간 일곱 번을 한국 선수가 우승컵을 가져가면서 ‘US 코리아 여자오픈’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LPGA 투어 대회에서 한국 선수끼리 우승을 다툰 적도 적지 않았다. 메이저대회 리더보드 상단이 한국 선수로 채워지는 풍경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새 이 같은 철옹성이 흔들리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에서 한국 선수가 메달을 따내지 못한 데 이어 11년 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자를 내지 못했다.
23일 끝난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AIG 여자오픈에서 안나 노르드크비스트(34·스웨덴)가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선수로는 공동 13위에 오른 김세영(28)이 가장 높은 순위였다. 11년 만에 LPGA 투어 메이저대회에서 한국인 우승자가 없는 시즌이 됐다. LPGA 투어 메이저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톱10에 들지 못한 것은 2003년 크래프트 나비스코챔피언십(현 ANA인스피레이션) 후 18년 만에 처음이다.
이날 영국 스코틀랜드 앵거스의 커누스티 골프 링크스(파72·6722야드)에서 열린 대회 4라운드에서 김세영은 선두 그룹에 3타 뒤진 공동 8위로 4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는 버디와 보기를 3개씩 기록하면서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노르드크비스트는 버디 4개, 보기 1개로 3타를 줄이며 우승 상금 87만달러(약 10억3000만원)를 받았다.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의 위상이 흔들린 가장 큰 원인으로 코로나19가 꼽힌다. 지난해 LPGA 투어 정상급 선수 상당수가 한국에 머물렀다. 출입국 때마다 자가격리를 하는 등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여정이 쉽지 않아졌다. 겨울 훈련과 출전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해졌고 대회 출전이 선수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신예의 미국 진출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김세영, 전인지(27), 박성현(28), 고진영(26), 이정은(25) 등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제패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2015년부터 LPGA 투어 신인왕을 휩쓸었다.
하지만 지난해 LPGA로 옮긴 선수는 김아림(26) 1명뿐이다. 최혜진(22)은 코로나19로 미국 진출이 꼬였고 박민지(23) 등은 LPGA 투어 진출에 유보적이다.
한국 신예들의 진출이 주춤하며 생긴 틈새는 태국과 필리핀이 채우고 있다. 올해 메이저 우승컵을 안은 패티 타와타나낏(21·태국)과 유카 사소(19·필리핀)가 대표적이다.
메이저대회는 끝났지만 LPGA 투어는 계속된다. 다음달 16일 미국 오리건주에서 열리는 캄비아 포틀랜드 클래식을 비롯해 10개 대회가 남아 있다. 박인비는 AIG여자오픈을 마친 뒤 “올림픽 이후 모든 선수가 출전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넘어온 선수도 많지 않긴 하다”면서도 “올해 전체적으로 성적이 별로 안 좋았던 만큼 분발해서 승수를 쌓겠다”고 다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