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내 제2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부지 선정을 두고 미 주정부와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삼성전자 임원진이 유력 후보지 중 한 곳인 뉴욕주 제네시 카운티를 전격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계 거물까지 나서 '삼성전자 모시기'에 공을 들이는 만큼 세금 감면 등 각종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척 슈머 "삼성의 지속적 고려에 감사"
7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 내 실세이자 뉴욕주를 대표하는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최근 "삼성전자 임원진들이 지난달 제네시 카운티 산업단지를 방문했다. 삼성전자의 지속적인 고려에 감사를 표한다"고 언급했다.특히 그는 "뉴욕주를 대표해 삼성전자에 두 차례 전화를 했다"며 '러브콜' 사실도 공개했다. 다만 누구에게 언제 연락했는지는 별도로 밝히지 않았다.
슈머 원내대표가 언급한 산업단지는 제네시 카운티에 위치한 '과학기술첨단제조산업단지'(STAMP·Science Technology Advanced Manufacturing Park)로, 약 1250에이커(약 505만 8570㎡) 규모다.
해당 부지는 파운드리에 필수인 물과 전기, 전문인력 등을 공급받기 수월한 곳으로 꼽힌다. 삼성전자 최대 협력사 중 하나인 IBM이 인근 뉴욕주 나노테크단지에 위치한 점도 플러스 요소다.
삼성전자 임원진의 뉴욕주 답사는 슈머 원내대표의 적극 구애로 성사됐다. 그는 여러 후보지 중 뉴욕이 가장 유력하다면서 타 후보지를 견제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적극적 여론전을 펼쳐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도 STAMP 현장 방문을 공식 인정했다. 미셸 글레이즈 삼성전자 오스틴법인 대변인은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파운드리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투자를 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 지역 실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공장 부지와 관련해선) 현재로서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여전히 뉴욕주 제네시 카운티를 포함해 텍사스주 오스틴·테일러와 애리조나 굿이어·퀸크리크 지역을 놓고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다.
미국 주정부들, 삼성 유치 위해 앞다퉈 '인센티브 제안'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 이후 삼성전자 임원진이 반도체 공장 후보지를 방문하고 관련 내용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상 삼성전자가 미국 내 부지에 대한 현지 실사에 본격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업계에선 그동안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았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테일러에 2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로이터 보도 이후 현지 분위기가 급변했다.
여기에 임원진이 뉴욕주 제네시 카운티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정치권 유력 인사의 입에서 전해지면서 '삼성전자 모시기'에 경쟁에 불이 붙었다.
더 나아가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말 방미 동안 다른 후보지들도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반도체 신공장 부지 결정의 윤곽은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모양새다.
현지에서 공장 후보지로 거론되는 각 지역 주정부들은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인텔과 TSMC가 연이어 파운드리 투자 발표 소식을 전하면서 사실상 삼성전자만 남은 상황. 때문에 주정부들은 수조원대 규모 세금 감면과 시설 구축 등 인센티브 패키지를 제안하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트래비스카운티와 윌리엄슨카운티 테일러에 세제 혜택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 미국에선 이 신청서를 인센티브의 최소 기준으로 보고 있다. 4 차례 유찰 끝에 다음달 16일로 일정이 연기된 애리조나주 굿이어와 퀸크리크 지역 경매에도 삼성전자가 참석해 공장 부지로 확정할 가능성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 평택에 짓고 있는 평택3공장(P3)에 파운드리 라인을 확보하고 2023년부터 가동할 계획이어서 미국 파운드리 투자가 일부 늦어지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챙길 건 챙기되 지나치게 간 보는 모양새 되면 곤란"
변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 혹은 가석방 여부다. 이 부회장의 8·15 광복절 이후 거취에 따라 삼성전자의 미국 공장 투자 방향에 대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업계는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결정이 늦어지는 데는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가 있다고 분석했다. 20조원에 가까운 대규모 투자를 총수가 부재한 상황에서 결정 내리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김기남 부회장은 지난 6월 초 청와대 간담회에서 "반도체 산업은 대형 투자에 대한 결정이 필요하다"며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진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선 TSMC와 인텔의 공격적 투자 움직임과 달리 삼성전자가 적극 대응에 나서지 않을 경우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현재 파운드리 글로벌 1위인 대만 TSMC는 향후 3년간 1000억 달러(약 114조원)를 투자해 미국 내 공장 6곳을 건설하는 등 대대적 투자 계획을 내놓은 상태다.
지난 3월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한 미국 인텔 역시 200억 달러를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짓는 한편 300억 달러를 들여 세계 4위 파운드리 기업인 글로벌파운드리(GF) 인수에 도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에서도 파운드리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스, 독일 정상들과 최근 만남을 갖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TSMC와 인텔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미국에 성의를 보였는데, 삼성전자가 미 주정부를 상대로 지나치게 간 보는 모습을 보일 경우 반감을 살 수도 있다"며 "이 부회장의 사면 여부와 미 주 정부 인센티브 등을 종합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이달 이 부회장의 사면 여부를 미국에서도 주시하고 있다. 가석방 기대감이 높아지는 만큼 신공장 후보지들로 거론된 지역들의 물밑 접촉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며 "미 정치권, 주정부 주요 인사들이 유치전에 뛰어든 만큼 과도하게 인센티브를 따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한미 동맹, 미국 반도체 고객사와의 관계 등을 앞세운 세련된 전략, 장기적 투자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