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조 천재’ 여홍철(50)의 딸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계 체조 팬들 뇌리에 새겼다. 한국 여자 체조의 간판으로 성장한 여서정(19)이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여자 체조 사상 첫 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서정은 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 체조 도마 결선에서 1, 2차 시기 평균 14.733점을 획득했다. 레베카 안드라데(브라질·15.083점), 마이케일러 스키너(미국·14.916점)에 이어 3위를 기록한 여서정은 동메달을 차지했다. 아버지인 여홍철 경희대 교수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도마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지 25년 만이다. 한국 최초의 부녀(父女)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여서정은 1차 시기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등재된 난도 6.2짜리 기술 ‘여서정’을 펼쳤다. ‘여서정’은 앞 공중 720도를 도는 기술로, 여홍철 교수가 1994년 완성한 ‘여2’(양손으로 도마를 짚은 뒤 두 바퀴 반을 비틀어 내리는 난도 5.6의 기술)보다 반 바퀴(180도) 덜 도는 고난도 기술이다. 2019년 6월 국제체조연맹(FIG) 규정집에 난도 6.2 기술로 공식 등재됐다. 여자 선수에게 어려워 난도 점수가 높다. 여서정은 수행점수 9.133점을 보탠 15.333점의 압도적인 점수를 받아 금메달까지 바라봤다.
하지만 2차 시기에서 14.133점을 얻어 평균 점수에서 밀려 3위로 값진 동메달을 수확했다. 여서정은 “1차 시기에 너무 잘 뛰어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2차 시기에서 실수한 것 같다”며 “(메달 색이 금이 아닌 것은) 아쉽지 않다. 그동안 열심히 (올림픽을) 준비했는데 너무 기쁘다”며 웃었다.
이날 딸의 경기를 KBS 해설위원으로 지켜본 여 교수는 메달 획득이 확정되자 “동메달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여서정의 1차 시도 땐 “착지가 거의 완벽했다”며 딸에게 힘을 실어줬다. 여 교수는 “(여서정이) 동메달을 딴 만큼 다음 2024년 파리올림픽에선 더 좋은 성적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서정도 그동안 조언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일본에 온 뒤 자신감이 많이 없어져 아빠랑 문자를 많이 주고받았다”며 “아빠가 장문으로 많은 글을 써줬고 ‘지금껏 잘 해왔으니 열심히 준비하라’고 격려해주셨다”고 했다.
여서정은 “아빠가 계셔서 부담감도 많았고 보는 시선도 많았는데 이젠 더 열심히 준비해 아빠를 이겨보고 싶다”고 했다. 여 교수도 “이젠 ‘여서정의 아버지’로 불리고 싶다”고 화답했다.
여서정이 이번에 딴 동메달은 한국 체조의 올림픽 열 번째 메달이다. 지금까지 거둔 아홉 개의 메달은 모두 남자 선수들 몫이었다. 1988년 서울 대회 도마에서 박종훈 현 가톨릭관동대 교수가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후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가 더 나왔다. 금메달은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양학선(29)이 도마에서 한국 체조 최초로 획득했다.
여기에 여서정이 여자 체조 선수로는 한국 최초로 올림픽에서 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면서 메달 수가 두 자릿수로 늘어났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처음 도입된 여자 체조 종목에 한국은 1960년 로마 대회에 처음으로 선수를 파견했다. 첫 파견 뒤 메달이 나오기까지는 61년이 걸렸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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