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기업과 대학들이 ‘K인공지능(AI) 연합군’을 꾸린 것은 각개격파로는 심화하는 AI 패권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특히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공세가 매섭다. 미국과 중국 거대 기업들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한 뒤 ‘하이퍼스케일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이퍼스케일 AI는 뇌의 학습·연산 기능을 담당하는 시냅스와 비슷한 ‘파라미터(매개변수)’의 양을 크게 늘린 AI를 말한다. 수개월이 걸렸던 AI 연산을 몇 초 만에 해내고 사람 같은 창의력도 갖췄다.
미국 오픈AI사는 작년 6월 1750억 개 파라미터로 구성된 하이퍼스케일 AI ‘GPT-3’를 공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작인 GPT-2보다 파라미터 수가 100배 이상 늘었다. GPT-3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올 2월 구글은 파라미터 수가 1조6000억 개에 이르는 AI 모델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에 질세라 중국 베이징 지위안 인공지능연구원은 지난달 파라미터 수가 1조7500억 개인 ‘우다오 2.0’을 공개했다.
AI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하이퍼스케일 AI의 진화는 미국과 중국 기업의 AI 지능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는 뜻”이라며 “이대로는 AI 패권 경쟁에서 한참 밀릴 것이란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네이버는 올 5월 파라미터 규모가 2040억 개인 AI ‘하이퍼클로바’를 개발했다. LG그룹도 최근 6000억 개 파라미터를 갖춘 초거대 AI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의 노력을 넘어선 국가 차원의 AI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고, 지난 27일 ‘K-허브 그랜드 컨소시엄’ 구성이란 결실로 이어졌다.
컨소시엄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네이버, 카카오, 통신3사,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이 참여한다. 세계 연구 동향 반영을 위해 구글, 페이스북 등 해외 기업에도 참여를 허용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해외 기업 참여는 연구에 도움을 받기 위한 차원으로 컨소시엄 연구 결과까지 공유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컨소시엄에서의 연구는 모두 하이퍼스케일급이면서 난도가 매우 높은 과제에 집중한다. 초거대 딥러닝 학습, 뇌파 기반 음성합성, 단백질 3차원 구조 예측, 자가 개선하는 로봇·드론 AI 등이다. 뇌파 기반 음성합성은 뇌파만으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것으로, AI업계에선 ‘꿈의 기술’로 꼽힌다. 최근 전 세계적인 메타버스 열풍을 감안해 ‘극사실적인 메타버스 시공간 설계 지능’도 연구 과제에 포함했다.
하이퍼스케일급 연구엔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가 필수다. 정부는 연구 초기엔 네이버, KT 등의 인프라를 빌려 쓰되 예산 수백억원을 투입해 50페타플롭스 규모 컴퓨팅 센터를 신설하기로 했다. 1페타플롭스는 초당 1000조 번의 연산 처리를 뜻한다.
다만 K-AI 연합군이 기대에 걸맞은 성과를 내려면 좀 더 과감한 재정 투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기정통부는 올해부터 2025년까지 컨소시엄에 예산 445억원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AI업계 한 관계자는 “제대로 된 컴퓨팅 인프라를 갖추려면 최소 1000억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현재 편성된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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