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주는 좋은 사주일까, 나쁜 사주일까. 나와 같은 날 태어난 내 친구와 나의 인생은 왜 다를까. 사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궁금증도 많아지고 있다. 그중에서는 편견과 오해도 있다. 한 번쯤 가졌을 사주에 대한 궁금증 다섯 가지를 풀어봤다.
(1) 같은 생일, 같은 운명을 살게 될까
명리학에서 경우의 수는 51만4800개. 단순 계산해보면 한국에만 나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이 인구 대비로 100명은 넘는 셈이다. 이들은 같은 삶을 살까. 당연히 아니다. 전문가들은 사람의 운명은 본인의 사주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사주팔자 외에 가족, 친구 등과의 관계 맺음으로 그 운명을 바꿔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날 태어나 같은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를 적극 지원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와 무관심한 가족 사이에서 큰 아이의 인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쌍둥이라고 해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과 관심이 다르고,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2) 좋은 사주 나쁜 사주는 있을까
사주의 기반이 되는 동양철학에 따르면 우주에 절대적으로 악하고 선한 것은 없다. 사주는 음양오행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양은 음이 될 수 있고 음 역시 양이 될 수 있다. 서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선악의 대결이 명확한 이원론과는 결이 다르다. 서양의 이원론이 절대적이라면 동양철학은 상대적이고 역동적이다. 융합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 절대적으로 고정돼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동양철학, 사주의 시작이다. 이런 관점에서 운명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사주와 나쁜 사주는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단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도화살, 역마살 등은 흉하게 여겨졌다. 이성에게 인기가 있는 것, 고향을 떠나는 것 모두 박복하고 소란한 삶을 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외에 생활터전을 마련하거나 이성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제왕절개로 완벽한 사주를 만들 수 있을까
사주팔자는 여덟 칸으로 구성된다. 가로에는 연월일시 네 칸이 들어가고 세로는 위쪽이 하늘을 의미하는 천간(天干), 아래쪽이 땅을 의미하는 지지(地支)다. 사람을 하나의 집으로 보면 연월일시 네 기둥이 있기 때문에 사주, 이를 총 여덟 글자로 나타내기 때문에 팔자라고 한다. 이 여덟 글자 안에는 금(金) 수(水) 화(火) 목(木) 토(土)의 오행이 자리잡는다. 각각의 오행은 음을 나타내는 글자와 양을 나타내는 글자로 다시 나뉜다. 음양오행이 고루 영향을 주고받는 ‘완벽한 사주’를 만들려면 8자 안에 10글자를 끼워 넣어야 하는데, 어떻게 조합해도 부족한 부분이 생긴다. 이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살도록 노력하는 게 사주를 해석하는 이유다. 모든 사주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 (4) 사주를 보면 궁합을 알 수 있을까
명리학에는 궁합을 보기 위한 이론이 없다. 하지만 연인의 궁합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사주를 통해 궁합을 보는 것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사주 상담가가 스스로 내린 해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한 사람의 사주는 상담가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둘의 사주가 성격 측면에서 부딪친다면 한 상담가는 잘 맞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다른 상담가는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할 관계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사주는 타고난 여덟 글자 외에 ‘대운’이라는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두 사람의 궁합을 판단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결혼 초반에 부부 관계가 큰 어려움을 겪지만 후반에는 대운의 영향으로 서로 화합한다면 이를 ‘좋은 궁합’ ‘나쁜 궁합’ 가운데 무엇으로도 판단하기 어렵다.
(5) 사주로 죽음을 예상할 수 있을까
명리학의 세계에는 전생과 내세 개념이 없다. 오직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생만이 명리학의 주된 관심사다. 생이 어느 형태로든 반복된다고 믿는 불교, 다음 생을 믿는 기독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생과 사를 사주로 예상할 수 있는 사주 상담가는 아무도 없다.명리학에서 보는 ‘명(命)’은 생명의 개념이 아니다. 각자의 인생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해석한다. 사명을 현생에서 어떻게 펼쳐 나갈지를 고민한다. 다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큰 사고나 병마가 다가오는 시기를 사주를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때 죽음이 닥칠지, 생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강영연/나수지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