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무척 헌신하는 후배가 있어요. 제 토르소 작품의 모델이 돼준 사람이기도 하죠. 이 친구가 10년 전께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때 인공수정 직후 시험관 속 수정란이 16개까지 나뉘는 과정을 지켜봤다더군요. 어렵게 아이를 탄생시키고 키워낸 그의 이야기에서 위대한 여성성을 느꼈습니다. 깨지고 갈라져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상처를 입어도 그 자체로 완전함을 지닌 여성의 강인함을 작품에 담았어요.”
12일부터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초대전 ‘세포분열’을 여는 승지민 작가(55)의 말이다. 국내 최초의 ‘포슬린 페인팅 아티스트’인 그는 이번 전시에서 여성성과 한국의 미를 주제로 한 작품 29점을 선보인다. 여성의 뒷모습 토르소나 달항아리 모양의 도자기 부조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배경이 되는 유화나 목판 위에 붙인 작품들이다. 달항아리 위에 그림을 새긴 작품, 도자기를 접목한 가리개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포슬린 페인팅(도자화)은 유약 작업까지 마친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고 800도로 한 번 더 구워 안료를 고정하는 상회(上繪)기법이다. 17~18세기 중국과 유럽 등에서 성행했고 지금까지 인기있는 도예 기법이지만 2000년대 중반 승 작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생소했다.
“단청이나 한복, 민화 등만 봐도 우리 민족이 화려한 색을 사랑한다는 점을 알 수 있어요. 달항아리 형태의 아름다움과 색감, 질감은 캔버스로 쓰기에 제격이죠. 여기에 색을 입혀 현대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달항아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승 작가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여성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는 가정주부로 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잠시 접어둬야 했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 우연히 포슬린 페인팅을 접했다. 취미로 시작한 작품 활동은 2004년 국제포슬린작가협회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받고, 이듬해 리스본에서 열린 제1회 도자기 페인팅 세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본격화됐다.
승 작가의 작품은 여성의 뒷모습과 달항아리, 석류 등 여성성과 생명을 상징하는 소재를 주로 다룬다. “달항아리의 불룩한 형태는 생명을 품은 풍만한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하늘에 뜬 보름달 같기도 하죠. 동양철학에서도 달은 음(蔭), 즉 여성을 의미합니다. 알을 품고 있는 석류 역시 생명과 다산을 상징하는 소재고요.”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세포분열’ 연작에서는 금이 가거나 깨진 달항아리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포슬린 페인팅의 특성상 달항아리 부조에 그림을 그리고 구워내면 절반 이상 금이 가거나 깨지게 된다. 이를 억지로 붙이는 게 아니라 금가루 등으로 틈을 메우고 장식해 깨지기 쉽지만 강인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전시 대표작인 ‘Life Begins in Sunset(인생은 황혼에 시작된다)’은 유화에 도자기 부조를 접목한 작품이다. 해질녘 하늘을 연상시키는 배경을 그리고, 그 위에 금가루로 장식한 깨진 달항아리 부조를 붙였다. 특수 약품으로 처리한 금가루 장식 표면은 달 표면 같기도 하고, 세포가 분열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금이 가고 깨진 모양은 달항아리가 본래 지니고 있던 곡선과 절묘하게 결합해 여성적인 미를 부각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승 작가의 작품은 외국 컬렉터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전시는 다음달 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