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남친, 쪽팔린다, 글구.
국가정보원이 지난 8일 공개한 북한 당국의 집중 단속 ‘남한식 말투’입니다.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남편을 ‘여보’ 대신 ‘오빠’, 남자친구를 ‘남동무’ 대신 ‘남친’, ‘창피하다’ 대신 ‘쪽팔린다’, ‘그리고’ 대신 ‘글구’ 등으로 사용하는 주민들을 “혁명의 원수”라고 규정했습니다. ‘K-드라마’처럼 길거리에서 포옹을 하는 등의 행동도 당연히 집중 단속 대상입니다. 집중 단속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북한 주민들이 이 단어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1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K팝을 ‘악성 암’이라 규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NYT는 “북한 관영매체는 K팝을 방치하면 북한이 축축하게 젖은 벽처럼 무너져 내릴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북한 여성들이 K-드라마의 영향으로 데이트 상대를 ‘동무’ 대신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례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도 여성이 손위 남자 형제를 오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오빠가 아닌 남자들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혁명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남조선식'에 빠진 북한 MZ세대
북한은 지난 6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식 의제로 “반(反)사회주의·비(非)사회주의와의 투쟁”을 채택했습니다. 주민들의 이른바 ‘남조선식’ 언행이 바로 반사회주의의 대표 행태입니다. 김정은은 지난 4월 북한 노동당 내 가장 큰 청년 조직인 ‘청년동맹’에 “고난의 시기에 나서 자란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리식 사회주의의 참다운 우월성에 대한 실 체험과 표상이 부족하며 지어 일부 잘못된 인식까지 가지고 있다”는 서한을 보냅니다. ‘고난의 시기’는 대규모 식량난으로 100만여명이 아사했다고까지 전해진 1990년대 후반을 뜻합니다. ‘반사회주의적’으로 말하자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입니다. 북한 정권이 MZ세대를 두려워한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 간사인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8일 정보위 전체회의를 마치고 취재진에 “비사회주의 행위 단속에 걸리는 연령대 10대에서 30대로, 우리로 치면 MZ세대”라며 “(북한 정권은) 북한판 MZ 세대가 동유럽 혁명을 주도한 ‘배신자’로 등장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동유럽 혁명은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유럽의 공산 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자유 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으로 인해 젊은층들이 ‘남조선식’ 문화에 젖어드는 것을 김정은이 체제의 위협으로까지 느끼기 시작했다는 분석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은 1984년생으로 엄밀히 말하면 MZ세대에 포함됩니다.
K-드라마 유입 통로는 막혔는데…
북한 주민들의 한국식 말투는 한국 드라마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됩니다. 북한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유입을 막기 위해 지난해 12월 법을 제정합니다. 바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한국 영상물 유포자는 사형에 처하고 시청자는 최대 15년에 처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뿐 아니라 한국 도서와 음악, 사진도 처벌 대상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달 한국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통과됩니다. 바로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북한의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한국 문화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법이고, 남한의 대북전단금지법은 한국 문화가 나가는 것을 막는 법이라는 점입니다. 이 법은 남북한 접경지대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할 경우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법의 별칭이 ‘대북전단’금지법이라서 그렇지 살포가 금지되는 품목에는 USB도 포함됩니다. 그동안 많은 탈북민단체들은 자신들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한국 영화나 드라마였다고 밝혔는데 남북 접경지대에서의 유입이 사실상 원천 차단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정반대의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오토 웜비어 검열·감시법’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북방송강화법입니다. 북한으로의 정보 유입을 확대해야 한다며 “북한에 대한 정보 유입을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통신·비통신적 수단을 개발할 것”을 촉구합니다. 정작 한국 정부는 접경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대북전단금지법을 밀어붙였지만 접경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북한으로의 정보를 유입하기 위한 대체 법안은 거론조차 않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엄격한 통제에도 주민들 사이에서 ‘오빠’가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남북이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자유 국가가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전 시기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주민들의 의식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도 큰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데나 ‘K’를 붙이며 홍보하던 정부가 왠지 모르게 북한으로 유입되는 ‘K-문화’에만 유독 소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평양에서 직접 공연도 한 레드벨벳과 조용필의 노래가 북한 주민들에게 일회성이 아닌 상시적으로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