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대규모 오라토리오(성가극)로 순국선열이 지켜낸 삶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지난 25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호국보훈음악회’를 통해서다. 79명의 한경필하모닉 단원과 60명의 위너오페라합창단원이 김덕기 지휘자(전 서울대 음대 교수)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화음을 빚어냈다. 대면 방식으로 열린 이날 공연은 유튜브와 네이버TV로도 생중계됐다.
한경필은 이날 베이스 심인성, 테너 김정훈, 소프라노 김은희, 메조소프라노 소라 등 네 명의 성악가와 함께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을 들려줬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7개 부속곡으로 이뤄진 위령미사곡으로, 벨칸토(아름다운 노래) 오라토리오의 정수로 꼽힌다. 이탈리아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1873년 타계하자 추모하기 위해 베르디가 쓴 곡이다. 1874년 밀라노 산마르코 성당에서 12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100여 명의 합창단이 초연했다.
베르디는 무대 규모를 크게 늘려 산 자들에게 삶의 엄중함을 전하려고 했다. 거대한 화음과 강렬한 오케스트라 선율은 듣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베르디를 연구한 프랑스 작가 알랭 뒤오는 이 작품에 대해 “모든 곡이 연극처럼 짜임새가 있어 마치 ‘망자(亡者)의 오페라’처럼 들린다”며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라고 해석했다.
공연의 시작은 잔잔했다. 첫 곡은 살아남은 자들이 신에게 자비와 안식을 기원하는 ‘Requiem et kyrie(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합창단의 멜로디와 성악가 네 명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두 번째 곡 ‘Dies Ireae(진노의 날)’이 연주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긴장감을 조성할 때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는 곡이다. 합창단은 “진노의 날엔 세상이 재로 변하리라”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소리를 키웠다. 거대한 파도 같은 화음이 50여 분 동안 객석으로 밀려들었다.
중간휴식(인터미션) 없이 이어진 후반부. 제3곡부터 제6곡까지 메조소프라노 소라, 베이스 심인성, 테너 김정훈이 번갈아 독창을 부르며 긴박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앞에는 오케스트라, 뒤로는 합창단을 둔 채 강렬한 음성으로 안식과 구원을 빌었다. 성악가들은 가사를 한 소절씩 합창단과 주고받으며 곡의 의미를 관객에게 아로새겼다.
지휘자의 노련함이 빛을 발했다. 여러 가지 목소리가 뒤섞였지만 합창, 현악 5부, 관악을 명료하게 구분해냈다. 박자를 조절하며 불협화음이 되지 않도록 연주자들을 이끌었다.
소프라노 김은희가 마지막 곡 ‘Libera me(나를 구원하소서)’를 부르자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의 열창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빚어낸 거대한 화음을 뚫고 객석으로 전해졌다. 김은희는 마지막 구절 “나를 구원하소서”를 읊조리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공연 후 호평이 잇따랐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오페라를 방불케 한 합창과 독창이 위력적이었다”며 “‘진노의 날’을 들을 땐 가슴이 서늘해졌다”고 말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도 “레퀴엠은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인데 파트별로 선율이 훌륭했다”며 “특히 현악 5부의 다채로운 연주는 곡의 매력을 더욱 깊이 들려줬다”고 평했다. 죽음의 신성함과 삶의 엄숙함이 맞닿아 있음을 절절한 멜로디로 전한 무대였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