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부족하면 정전 사태가 벌어진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전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도 정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력은 매 순간 사용량에 맞춰 공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파수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 발전소 터빈에 탈이 나고 전기 생산이 멈추게 된다. 주파수를 사람의 맥박에 비유하면, 빈맥이나 서맥 현상이 일어나 심장에 무리가 간 나머지 결국 심장이 멎는 셈이다. 전기를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게 충분히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이유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원인 그레천 바크는 《그리드》에서 전기를 공급하는 인프라 전반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리드는 단순한 전력망뿐 아니라 전기를 공급하고 사용하는 시스템 전반을 폭넓게 일컫는 단어다. “우리의 스마트폰도 그리드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전력 인프라 없이는 전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효율적으로 기업과 가정에 전력을 공급해오던 그리드는 최근 기후 변화로 위기를 맞았다. 태풍이 잦아지면서 송전망이 자주 고장나게 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인 게 그리드에 더 큰 타격을 줬다. 지금의 그리드는 화력·원자력발전소 등에서 대규모로 생산한 전력을 전국 각지에 보내는 데 최적화돼 있다. 하지만 시간과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태양광, 풍력 비중이 급증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이에 따라 올초 미국 텍사스에서 대정전이 일어나는 등 곳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저자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려면 그리드를 전면 재구성하는 게 급선무라고 역설한다. 그리드를 소규모로 쪼개고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을 통해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완충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의원과 환경운동가를 비롯한 모두가 재생에너지에 관해 희망찬 꿈을 꾸고 있지만, 그리드를 이에 맞춰 변형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그리드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한 우리는 낮과 밤을 더 밝게 밝힐 수도, 기상이변을 줄일 수도 없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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