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산업이 싹틀 조짐이 보이면 늘 불청객이 찾아온다. 공무원들이다. 여러 부처가 달려들어 법을 만들겠다며 경쟁을 벌인다. 일종의 ‘나와바리’ 싸움이다. 수십 년 전 온라인교육산업이 등장하자 교육부, 산업부, 과학기술부 등이 서로 자기 영역이라며 법 제정 주도권을 놓고 싸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돈과 사람이 몰리고 있는 암호화폐는 이상하게도 모든 부처가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블록체인은 육성해도 암호화폐는 안된다’는 기조가 바뀌지 않고 있다.
암호화폐거래소 빗썸의 허백영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블록체인은 인류가 처음으로 발명한 위조 불가능한 기록이며, 이 기술을 처음으로 활용한 것이 암호화폐 비트코인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분리해 생각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블록체인을 혁신기술로 보고 육성책을 펴고 있는 정부가 암호화폐는 ‘투기’ ‘거품’이라며 발 담그기를 꺼리는 이유가 뭘까.
관련 부처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내재가치가 있는지, 화폐인지, 금융자산인지 등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해외도 아직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솔직히 정부에서 진지한 고민과 학습이 없었다.” 그래도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청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규제를 하려면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처럼 관련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자칫 금융자산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비쳐 투기열풍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인 열풍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과잉 유동성이 해소되면 거품이 일시에 꺼질 수 있다. 규제의 ‘글로벌 스탠더드’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당국자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선진국들이 우리보다 전향적이라는 점이다. 캐나다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했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는 비트코인 선물이 거래되고,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암호화폐거래소 코인베이스의 상장을 승인했다. SEC는 비트코인 ETF 승인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은 이미 당국의 규제를 뛰어넘고 있다. 테슬라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등은 암호화폐 결제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블랙록 등은 비트코인을 투자포트폴리오에 편입하기로 했다. 국내 대형은행과 기업들도 코인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은 이런 흐름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과 전임자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일관되게 “투기수단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린다. 한국은행도 “내재가치가 없는 투기자산”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결제통화로서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고, 중앙은행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암호화폐의 가격변동성이 줄어들고 결제수단으로 널리 사용되면 발권력과 금리결정 등 통화정책을 독점해온 중앙은행의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각국 중앙은행이 암호화폐에 단호한 이유다.
역사적으로 신기술의 등장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비즈니스와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가져왔다. 기술 개발과 혁신의 속도를 규제가 따라가지 못하고 발목을 잡는 경우도 다반사다. 19세기 영국은 마차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붉은 깃발법’을 만들었다. 이 규제가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산업의 주도권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 빼앗겼다. 지금은 스타트업 등 일부 기업에 국한된 얘기지만 블록체인 기술로 코인을 발행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게 기업들의 새로운 자금조달 모델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블록체인은 육성해도 암호화폐는 안된다’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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