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평판디스플레이 그리고 조선 같은 제조업에서는 글로벌 1위를 달성한 국내 기업이 있다. 그럼 자연스럽게 제조 관련 지식서비스산업과 정보기술(IT)산업에도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한 국내 기업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제조 자동화, 제조 IT 부문의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한 기업은 찾기 어렵다. 제조업의 지식산업 전환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무엇이 문제일까?
제조업체의 경직된 문화? 협력업체와의 고질적인 갑을 관계? 혁신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제조업의 특징? 이런 문제가 제조업 지식 전환의 방해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술과 프로세스 혁신의 엇박자에 있다. 그럼 기술과 프로세스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야기를 돌려 잠시 19세기 공장의 모습을 살펴보자. 산업혁명 시대 대형 증기기관이 등장하면서 공장들은 이들 대형 증기기관에 의해 가동됐다. 증기기관은 클수록 효율이 좋기 때문에 공장 지하에는 거대한 증기기관이 설치됐고 증기기관에서 발생한 동력은 벨트와 기계축을 통해 공장 내 장비들에 전달됐다. 힘을 많이 사용하는 제조설비는 증기기관 인근에 설치되고 그렇지 않은 설비는 멀리 떨어져 설치됐다. 증기기관과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질수록 힘을 전달하기 어려워 동력 사용 순위에 따라 설비 위치가 결정됐다.
20세기 초에는 전기모터가 개발되면서 전기모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공장이 늘어났다. 그런데 전기모터는 전력 배분이 자유로워 장비를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기기관을 사용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증기기관 세대가 은퇴하자 비로소 설비를 동력 사용 순서가 아니라 제품이 가공되는 순서로 배치하며 대량생산이란 제조 혁신을 이루게 됐다.
20세기 초 개발된 전기모터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이 혁신적인 기술은 바로 공장에 적용됐지만 공장의 진정한 혁신은 증기기관 세대가 은퇴한 이후에나 가능했다. 이런 공장의 역사가 시사하는 것은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해도 그 기술을 활용하는 프로세스와 작업하는 방식에 변화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삽질과 곡괭이질로만 토목공사를 하던 시대에 갑자기 포클레인 같은 기계 장비가 개발되면 너도나도 포클레인 기사가 되려고 하고, 기업은 서둘러 포클레인을 구매할 것인데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토목공사를 하는 근본적인 업무 방식과 프로세스가 변화하지 않고는 포클레인 기사와 포클레인이 아무리 많아도 공장 혁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제조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하려는 IT와 인공지능(AI) 기술도 마찬가지다.
제조의 지식 전환은 기술적인 이슈만은 아니다. 아무리 첨단 AI 학자와 IT를 도입해도 그 기술의 의미가 무엇이며 제조 시스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전문적인 경험, 그리고 프로세스 혁신을 주도할 리더십이 확보되지 않으면 제조업의 지식 전환은 불가능하다.
최근 정부 주도로 스마트공장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스마트공장 공급 기업으로 등록한 업체는 2020년 기준 600개가 넘는다. 그러나 대부분이 10명 남짓한 영세기업이다. 깊이 있는 기술과 연구개발(R&D) 기반을 갖추고 고객 기업의 제조 프로세스 혁신을 이끌 정도의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세계 제조·공급망이 새롭게 재편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선진국들이 자국 내 제조·공급망 구축을 적극 추진 중이다. 다행히 한국은 글로벌 제조기업이 건재하다. 스마트공장과 기타 제조 IT 등 제조 지식산업 육성의 희망이 있다. 최고 IT 강국인 미국은 우수한 IT 인력이 제조보다 서비스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제조업의 규모 면에서는 중국이 압도적이지만 제조 IT와 제조 지식산업 분야는 아직 시작 단계다. 독일 지멘스가 제조 IT의 선두주자이지만 아직 제조 IT 및 지식 서비스 분야의 시장 기회는 충분하다. 제조 강국에서 이제 제조 IT 및 제조 지식산업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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